집값 하락 후폭풍 … 아파트 집단대출, 은행 새 골칫거리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지난 13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4가 신한은행 본점. 로비 한쪽에 와이셔츠를 입은 50명 안팎의 남성이 둘러앉아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벽산건설 노동조합원들이다. 이들이 건넨 유인물엔 ‘직원 자서(자필서명) 중도금 대출을 은행이 책임지고 해소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경기도 고양시 식사동 아파트 집단대출 과정에서 발생한 직원 명의 대출을 회사 명의로 바꿔달라는 주장”이라고 은행 측은 설명했다.

 #우리은행은 최근 집단대출과 관련한 대형 소송 두 건에 휘말렸다. 일산 덕이지구의 신동아아파트와 김포 한강신도시의 우미린 아파트를 분양받은 계약자들이 “중도금 대출을 없던 걸로 해달라”며 ‘채무 부존재 소송’을 낸 것이다. 소송 금액만 두 곳을 합쳐 1600억원에 달한다. 우리은행 주택금융부 관계자는 “아파트 값이 오르지 않자 계약자들이 분양사를 상대로 계약 해제 소송을 걸면서 은행까지 걸고 넘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파트 집단대출이 은행권의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아파트 값이 떨어지면서 각종 소송과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집단대출 연체율도 빠르게 치솟고 있다.

 특정 목적의 대출을 같은 조건으로 해주는 집단대출은 아파트 분양 때 건설사가 고객에게 제공하는 대출이 대표적이다. 아파트값이 오르던 시절엔 집단 대출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분양받은 이들이 대출금을 갚지 못할 상황이 돼도 아파트를 처분하면 빚을 갚고 남았기 때문이다.

 아파트 값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요즘은 다르다. 중도금을 빌려 분양받았는데 주변 시세가 분양가보다 떨어지는 일이 늘고 있다. 화가 난 계약자들이 분양회사를 상대로 분양계약 해제 소송을 내는 경우도 많다. 은행은 이때 부록처럼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을 당한다. “분양 계약을 전제로 한 대출이니 계약이 취소되면 대출 계약도 없던 일로 해달라”는 것이다. 농협은행은 집단대출과 관련해 이런 소송만 44건(소송액 922억원)이 걸려 있다. 은행권 전체로는 100건에 가까울 것이라는 것이 분양업계의 추정이다.

 미분양분을 직원이 떠안으며 돈을 빌렸다가 갚을 방법이 없어지자 은행을 걸고 넘어지는 경우도 많다. 억지로 떠안으면서 자필서명을 했다는, 이른바 ‘자서 세대’로 불리는 물량이다. 문제는 이 물량이 팔리지 않으면서 수억원의 빚이 직원들을 옭아매고 있다는 것. 벽산건설 노조 측은 “중도금 대출 때문에 은행 돈도 더 못 빌리고 신용카드도 쓸 수 없다”며 “은행이 책임지고 직원 자서 대출을 해소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행 측은 “난감하긴 하지만 해결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분양 과정에서 생긴 문제를 대출해 준 은행에까지 책임을 물으니 은행으로서도 펄쩍 뛸 노릇”이라며 “소송 기간엔 대출 이자를 보통 연체시키기 때문에 건전성이 악화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지난해 말 1.35%였던 집단대출 연체율은 4월 기준 1.84%로 눈에 띄게 높아졌다.

 금융당국은 집단대출을 전수조사해 관리를 강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연체와 소송이 급증하는 것을 감안해 특단의 조치를 내리겠다는 것이다. 금감원 은행감독국 권창우 건전경영팀장은 “주택시장 침체 때문에 집단 대출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며 “은행 건전성이 너무 악화되지는 않는지, 대출 계약 당시 소비자 권익은 충분히 알려주고 있는지 등을 적극 점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집단대출 일정한 자격을 갖춘 집단에 대해 일일이 대출 심사를 하거나 대출 조건을 따지지 않고 일괄적으로 승인해 주는 대출을 말한다. 아파트 분양자를 대상으로 내주는 중도금 대출이 대표적이다. 보통 대출 금리가 저렴하고 중도 상환수수료 부담 등이 작은 편이다. 은행 입장에선 한 번에 많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자서 자필서명의 줄임말. 건설업계에선 미분양 물량을 직원이 분양받은 것처럼 넘겨 자필서명을 받는다는 뜻에서 ‘직원 자서 세대’라는 은어가 쓰이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