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영화·연극계 '신조어' 남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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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영화계에서 잘 쓰는 단어가 블록버스터(blockbuster)다. 제작자가 많은 돈을 들여 만든 영화를 관객에게 선보일 때 광고문안에 큼지막하게 쓰는 말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한국형 대작' 이 정확한 표현이다.

블록버스터는 'block(미국 도시의 구역단위)+buster' 로 '블록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미어터질 정도로 흥행에 성공한 작품' 이라는 뜻이다.

미국에서 이 말은 흥행에 성공한 영화나 베스트셀러 등에 쓰인다. 그렇다면 흥행에 성공할지 여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국내 영화계가 보도자료 등에 남발하는 블록버스터는 흔한 말로 '뻥튀기' 의 대표적 예다. 그렇지 않다면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식자들의 잘못된 언어 습관이라는 게 언어학자들의 지적이다.

영화.만화계에서 잘 쓰는 애니메이션(animation)도 '만화영화' '동영상 만화' 라는 우리 말 표현이 가능하다. 'animate' 이란 동사는 '움직인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난타' 나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도깨비 스톰' 이 홍보물 등에 빠지지 않고 쓰는 표현이 '넌버벌 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 다.

이 말은 '비언어 공연' 이란 뜻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정확한 표현은 '타악 연주(percussion)' 가 맞다. 주방에서 도마를 두드리든, 항아리.대나무 등을 이용해 연주들 하든 타악기를 사용한 연주이기 때문이다.

넌버벌 퍼포먼스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겐 어색한 표현이라는 게 영자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중앙일보' 에서 일하는 데스크들의 지적이다. '퍼포먼스' 란 뜻은 말하지 않는 공연인 댄스와 언어를 사용한 공연을 모두 지칭하고 있다.

TV.라디오 방송에서 애용하는 '새로운 말 만들기' 는 도를 지나친 형국이다. 방송위원회가 지난해 8월 '방송프로그램명 외국어 및 조어 사용 남용' 실태 조사에서 KBS.MBC.SBS 등 주요 지상파 3사의 경우 전체 프로그램 중 약 33~41%가 외국어 및 국적.출처 불명의 제목과 부제를 무분별하게 쓰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방송위는 방송사들에 시정권고를 했고 방송사들은 "고려해서 시정하겠다" 고 했지만 그 때 뿐이었다. 방송위 관계자는 "방송사들이 시정할 의지가 없다" 고 말했다.

방송위는 지난달 같은 내용을 재차 조사해 발표했다. 방송사마다 예전보다 다소 줄었지만 방송위 산하 방송언어 특별위원회가 지적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TV캠프…슬라이딩 터치다운' '스튜디오 앙케트쇼' '사이버월드 웹투나잇… 쿨 아이 사이트' '러브러브 쉐이크' '엔포다큐' '토커넷 쇼' '뮤직카페 라이브무대' ….

이시형 박사(정신과 의사)는 이런 사회현상을 '신어(新語)조작증' (neologism)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새로운 것을 찾는 현대인의 강박증이 '지적 허영심' 과 맞물려 이뤄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박사는 "인터넷 시대에 편리하고 좋아서 쓰는 '잡종 언어' 를 나쁜 것만으로 볼 수는 없다" 면서도 "이런 언어를 지나치게 많이 쓰는 게 문제" 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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