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나는'이란 주관적 표현 칼럼에 쓰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주관이 많고 독선적이다."

보름 전 나간 본 칼럼에 대한 일부 반응이다. KSS해운의 사사(社史) 를 국민적 교과서로 읽어야 한다는 강력한 옹호가 '객관 보도' 라는 저널리즘 덕목과 거리가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다.

더 중요하게는 스타일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실은 그 칼럼에서 나는 처음으로 서술의 화자(話者) 를 '나는…' 으로 노출시켜 보았기 때문이다.

고마운 문제제기에 힘입어 나는 뉴저널리즘 논의를 음미해볼 참이고, 나아가 뉴스언어의 패러다임 전환 문제도 언급해볼 생각이다.

지적논의의 주변부인 한국사회에는 다소 낯선 뉴저널리즘이란 한마디로 요즘의 언론이 '재래식' 과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즉 1960년대 이후 서구의 뉴저널리즘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이른바 객관 보도라는 것과 거리를 두는 특색을 보인다.

19세기 중반 근대언론들이 내세웠던 '특정정파로부터 독립' '객관보도' -한국언론의 사시(社是) 에 등장하는 '불편부당' 의 모델이다-에서 전환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뉴스 =현실 그 자체' 라는 신화가 깨졌다는 발견이 중요하다.

이미 1920년대 월터 리프먼의 선구적인 지적대로 뉴스언어란 사회적 책임을 전제로 특정언론사가 '가공한 현실' '인식한 현실' 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서울대 강명구 교수는 『한국저널리즘 이론』(나남, 1994) 에서 '뉴스 리얼리즘' 을 제창한 바 있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어차피 언론활동이란 객관적 사실의 짜깁기가 아닌 '문화적 담론체' 라는 것, 따라서 객관 보도에 몸을 숨기지 말고 자기의 목소리를 충분하게 내야 한다는 것 말이다. 그러하니 의견성 기사에서 '나는' 이란 표현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는' 이란 표현이 동양적 겸양지덕에 다소 걸리는 듯 보일 수도 있지만 정보 과잉 속의 다매체 시대에 '해석으로서의 칼럼과 리뷰' 에 '나는' 이란 표현은 대세다.

'탈(脫) 사실 시대의 뉴스언어' 의 핵심인 '나는' 이라는 표현은 포스트 모던 시대의 키워드라고 나는 판단한다.

무슨 말인가? 말하자면 객관보도란 전지칭(全指稱) 의 시선을 전제로 한다. 저 위에서 내려다보며 객관적 현실을 재구성하는 하느님의 시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가능한 노릇인가. 따라서 '나는' 은 이미 불가능해진 그런 시선을 깨끗히 포기하고 '나는 이렇게 보았다' 고 밝히는 것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이 논의의 인식론적 성찰을 한차례 더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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