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이쾌대 자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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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권근영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

“사랑하는 나의 귀동녀여! 당신은 왜 이다지 나의 마음을 끕니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솟아나며 하늘나라 어린이들이 우리 두 사람 머리 위에서 날면서 행복의 씨를 뿌려주는 것 같습니다.”

 편지를 쓴 이는 당시 휘문고보생 이쾌대(1913∼65), 편지 속 ‘귀동녀’는 진명여고생 유갑봉이다. 경북 칠곡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이쾌대는 고보 졸업 후 유갑봉과 결혼한다.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와 화가로 활동했다. 견고한 데생력을 바탕으로 민족의식을 내세운 작품에 몰두,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리얼리즘을 개척했다. 비극은 전쟁과 함께 왔다. 이쾌대는 6·25 직후 남조선 미술동맹에서 활동하며 인민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다. 거제 수용소에서 휴전을 맞아 남북 포로교환 때 북으로 갔다.

 1948년에 그렸다지만 이 그림, ‘푸른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40년 뒤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월북 화가들의 작품이 해금됐다. 남은 가족들이 그간 겪었을 고초는 짐작만 할 뿐. 유갑봉씨는 벽 속에 남편의 그림을 넣어 보관하기도 했다. 결국 해금을 보지 못하고 1981년 작고했다. 이쾌대의 그림 대부분은 현재 삼남 한우씨가 간직하고 있다. 격변의 시기를 지나온 많은 근대 미술가들의 작품이 여기저기 흩어지거나 위작 논란에 시달리는 것과 대조된다. 이들에겐 이 그림이 남편이고, 아버지였을 터다. 이쾌대는 갔지만 그림은 남아 이런 시대가, 이런 화가가 있었음을 증언한다.

 그림 속 이쾌대는 중절모를 쓰고 두루마기를 입었다. 한 손에 한국화용 모필을, 다른 손엔 서양화구인 팔레트를 들고 있다. 배경의 야트막한 산, 초가집, 물동이 인 여인이 정겹다. 복장은 조화롭지 못하고 원근법은 과장됐다. 그림이 어딘가 촌스러워 보이는 것은 이 같은 부조화 때문일 거다. 그러나 전통과 현대의 조화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다를 바 없는 과제다. 이 ‘지금’을 만든 것이 안개 같은 그 시간을 나침반도 없이 헤쳐온 근대인들인 것을.

 촌스러운 분위기를 상쇄하는 것은 청량한 푸른 두루마기와 정면을 직시하는 형형한 눈빛이다. “나는 그저 환쟁이가 아니라 지식인이오. 이 땅에 단단히 발 딛고 서서 이 땅을 그리겠소”라는 의지와 자신감이 읽힌다. 순수하게 열정을 토로했던 연애편지처럼, 이쾌대의 자화상은 그와 눈 맞추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어설픈 그때 그 그림들 속에 중심을 잡고 있는 이 그림은 그렇게 한국 근대 미술의 대표작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