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독립영화 선구자 '스파이크 리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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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영화의 기수로 손꼽히는 스파이크 리(44) 감독의 실험.저항정신은 여전했다. 흑인의 정체성을 부단하게 탐색해온 그가 '뱀부즐드' (Bamboozled)란 디지털 영화로 베를린영화제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제목은 '속이다' '현혹하다' 는 뜻인 영어단어 뱀부즐의 수동형. 그런데 누가 현혹됐다는 것인가. 물론 흑인이다. 그렇다면 속이는 주체는? 감독은 영화.TV 등 현대의 영상문화를 지목한다. 영화잔치에서 되레 영화 자체에 비수를 꽂은 셈이다.

'뱀부즐드' 는 8㎜ 비디오 카메라로 뉴욕 거리를 찍으며 영화에 입문했던 그가 고선명 디지털 카메라로 만든 작품. 그는 "대형영화사 여러 곳에 제작을 문의했으나 반응이 없어 1천만달러(약1백20억원)짜리 저예산 미국영화를 만들게 됐다" 고 말했다.

영화는 하버드 대학을 나온 엘리트 흑인 방송작가(데이먼 웨이언스)가 시청률을 획기적으로 올리는 프로그램을 내놓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사장의 주문에 따라 흑인들을 웃음거리로 만든 버라이어티쇼를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만 종국엔 주변 동료.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파멸해가는 과정을 생동감 넘치게 그리고 있다.

"영화가 발명된지 1백년이 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화는 무엇을 했나. 사람들은 21세기의 시작을 말하지만 흑인의 지위는 달라진 게 거의 없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왔던 4백여년 전에 비해 본질적으로 나아지지 않았다."

지난 12일 시사회를 마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매우 공격적이었다.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흑인이 많이 사는 플로리다주의 재검표를 허용하지 않은 것을 보라" 고까지 말했다.

그는 흑인을 오락의 대상으로 삼았던 옛날 영화.TV프로.애니메이션.극장쇼 등을 중간중간 보여주며 20세기 미국 대중문화가 얼마나 많은 편견과 위선에 오염됐는가를 비판했다. 미국 영화.TV를 통렬하게 풍자한 것이다.

"흑인의 이미지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정면에서 다루기 어렵거나 고통스런 주제를 다룰 때 풍자만한 수단이 없다고 본다." 1960년대 암울한 정치상황에서 '풍자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고 한 김수영 시인을 연상시키는 발언이다.

영화 속의 재미있는 장면 하나. 사장이 작가에게 주문한다. "절대 스파이크 리 같이 만들면 안되고 쿠엔틴 타란티노 정도면 된다." 대중소설.음악 등의 흥행요소를 영화 속에 능숙하게 요리하는 타란티노 감독에게 딴죽을 거는 걸까.

하지만 그는 "타란티노 감독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고 말을 끊었다. 그가 기대하는 것을 물었다. "과거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20세기 미디어산업에 그려진 흑인에 대한 비틀어진 인식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 영화는 그 목표를 향한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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