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 타령하는 진보의 미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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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호 02면

통합진보당에는 ‘혁신비상대책위원회 새로나기특별위원회’라는 긴 이름의 조직이 있다. 줄줄이 들어가 있는 혁신, 비상, 특별 등의 단어는 아마도 최근 통합진보당이 당면한 위기감을 반영한 것일 게다. 그 ‘새로나기특별위원회’의 박원석 위원장이 24일 한겨레신문과 인터뷰했다. 중앙SUNDAY도 박 위원장을 비롯해 통합진보당 인사들에게 여러 차례 인터뷰 신청을 했었다. 하지만 모조리 거부당했기 때문에 열심히 읽어 봤다. 보도에 따르면 박 위원장은 “통합진보당의 패권적·폐쇄적 정파조직 문화가 상식적인 정당의 질서, 운영원리와 다르다는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명한 민생정당으로서 다양한 진보의 가치를 끌어안고 현대화된 정책 정당으로서의 의제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도록 바꿔가겠다”고 다짐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종혁의 세상탐사

박 위원장의 다른 얘기도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통합진보당이 원내 제3당으로서 정치적 책임을 요구받는 상황에서 불거진 중앙위원회 폭력사태는 민주주의에 대한 보편적인 상식과 진보정당에 대한 기대와 동떨어진 참담한 모습”이라며 “경선 부실 문제가 다른 당에서 발생했다면 사퇴를 포함해 즉각적인 해결책이 나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열심히 읽어가던 나는 다음 대목에서 한숨이 나왔다. 박 위원장은 “종북은 진보단체를 용공, 좌경으로 매도하려는 보수언론, 단체가 짠 이데올로기적 프레임(틀)”이라고 주장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통합진보당은 요즘 중앙일보를 비롯해 조선·동아일보와는 인터뷰 자체를 안 한다. 민주노총은 기자회견장에 3개 신문사 기자가 있으면 쫓아낸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을 연상케 하는, 북한에서나 가능할 법한 언론탄압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종북이 보수언론이 짠 프레임’이라니, 제발 진실을 얘기하자.

종북이란 단어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건 2008년 초다. 간첩조직인 일심회에 포섭된 당원들을 현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노당 지도부가 제명하지 않자 심상정·노회찬 의원 등이 탈당하면서 “종북주의자들과 함께할 수 없다”고 외친 것이다. 솔직히 말해 보수 언론은 주사파 계열이 민노당 내부에서 그 정도로 막강하다는 걸 대부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뒤 잠잠하던 종북 논란은 이번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선거 부정 때문에 다시 불거졌다. 이 역시 보수 언론이 아니라 당원들이 당내 게시판에 먼저 의문을 제기해서다.
지금까지 이른바 진보는 자신들의 문제를 걸핏하면 조중동 탓으로 돌리며 진실을 호도해 왔다. 선거부정을 저질러 놓고도 “이런 게 공개되면 조중동의 공격 대상이 된다”며 덮으려고 했고, 성폭행 논란이 벌어져도 내부에서 “조중동의 먹잇감이 되면 안 된다”는 기막힌 주장이 횡행했다고 한다. 나는 진보가 그런 식의 유치하고 터무니없는 진영논리에 기대면서 내부적으로 썩고, 곪고, 부패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주사파를 진보로 알고, 그들이 민주화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던 국민들은 아마도 그들의 실체를 보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일 검찰이나 보수세력이 먼저 주사파의 실체를 문제 삼았으면 아마도 ‘색깔론’이니 ‘용공음해’ ‘조중동의 음모’니 하는 아우성에 버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국민들도 헷갈렸을 게 뻔하다. 헤겔은 “역사의 필연의 법칙은 우연에 의해 관철된다”며 역사의 간지(奸智)를 말했다.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주사파의 실체가 전혀 엉뚱한 사건을 통해 예상치 않게 드러나는 걸 보면 헤겔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수천만 명을 학살한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도 한때 미국과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 그 두 사람을 칭송하면 대개는 약간 맛이 간 사람 취급을 받는다. 미국 대통령 링컨은 “모두를 잠깐 동안 속일 수는 있고, 일부 어리석은 사람들을 영원히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모두를 영원히 속일 순 없다”고 했다. 진보는 그동안 조중동을 실컷 우려먹었지만 국민 모두 바보가 아닌 한 그런 타령에 무한정 끌려다니진 않을 것이다. 진보, 이젠 정신 좀 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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