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코치] 뚱뚱한 아이에게 자신을 그려보라고 하자…

중앙일보

입력

[박민수 박사의 ‘9988234’ 시크릿]

가정의학과 전문의
박민수 박사

소아비만 아이들은 자아상실을 경험하기 쉽다.

병원치료과정 중 미술치료세션에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시간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자화상을 그리거나 남이 보는 나의 자화상을 그리게 된다. 비만 아동들은 많은 경우 자기가 원하는 모습과 현실의 모습 사이에 괴리감이 커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상을 가지지 못한다. 비만한 아이에게 종이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라고 하면 실제 모습과는 다른 왜곡된 모습을 그린다.

고도비만으로 고생하는 현아는 미술치료 과정에서 도화지에 수퍼모델처럼 날씬하고 키가 큰 여자를 그리고 온갖 장신구들로 치장을 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것이 자기라고 이야기한다. 활기차던 현아가 갑자기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세달 전부터였다. 같은 반 친구 중에 유독 여자애들의 외모에 대해 입방정이 심한 남자애 하나가 현아를 놀리기 시작하였다. 그 애가 현아를 놀리자 다른 남자애 몇 명도 동참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을 놀리는 친구들에게 대들거나 무시하던 현아도 시간이 지나면서는 내가 정말 저 아이들 말대로 돼지 같은 모습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문제는 자신을 놀리던 아이들에게 향하던 공격성의 화살이 자신을 자책하는 것으로 모아졌다는 것이다.

현아의 머릿속에는 ‘나는 왜 이렇게 뚱뚱해진 것일까? 왜 엄마는 나를 이렇게 뚱뚱하게 낳아서 놀림을 받게 하는 거야? 음식을 조절하지 못하는 나는 정말 멍청이야!’ 등 부정신념들이 하루 종일 맴돌았다.

이처럼 가득 쌓인 부정신념들은 우울, 불안, 분노 등의 스트레스증상들을 몸과 마음에 촉발시켜 가뜩이나 탈출구를 찾던 현아의 식탐은 폭식과 속식으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현아가 그린 도화지속의 현아는 여전히 수퍼모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현실의 모습을 잊고 싶은 것이다.

한두달이 지나자 한참 멋을 부리고 수퍼모델에 관심이 많던 자신만만 현아가 집에서도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리며 짜증을 내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이유 없이 마구 떼를 쓰고 나서 식탁에 앉은 현아가 거의 어른 3인분을 꾸역꾸역 먹어 치우자, 엄마가 그만 먹으라고 제지를 하였다. 현아는 거의 정신이 나간 애처럼 고함을 지르며 ‘나 이것 먹고 배터져 죽을 거야’라고 발악을 하였다.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엄마는 부랴부랴 병원을 방문하였다.

자아분리 상태가 지속되면 현실도피 심리로 발전될 수도

일반적으로 미술치료 과정에서 뚱뚱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도화지에 그리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결국 아이들에게 현실의 나는 숨기고 싶고 지우고 싶은 존재인 것이다. 이런 자아분리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현실도피심리가 강화되고, 아이의 자존감은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사에 따르면 어릴 때 비만인 아동은 13~14세가 되었을 때 심한 자존감 저하 현상이 나타난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성취동기가 희박한 나약한 아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더 나쁜 점은 비만한 아동은 담배, 약물의존, 우울증, 양극성장애, 불안장애, 사회공포증,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식이장애의 발생 빈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비만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탈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엄마도 현아의 자존감 저하가 자신이 생각하는 외모기준과 현재의 외모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여 무진 다이어트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대인기피증이 있는 사람이 아무런 준비없이 사람 앞에 나서면 대인기피가 더 심각해지는 것처럼 이미 낮아진 자존감으로 스트레스가 과도한 상태의 현아에게 다이어트 스트레스까지 얹어지자, 별다른 해결책없이 다이어트는 답보상태였다.

현아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심각하였다. 본인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현아에게 다음과 같은 숙제를 내주었다. 현아가 가지고 있는 장점 10가지를 적어오는데 몸이나 외모 중 한가지는 포함할 것이었다.

기실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하고 화통한 성격이었던 현아는 지금의 불운한 처지에 사로잡힌 생각의 나래를 펼치자마자,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상냥하게 대해주면서 인기를 끌었던 자신의 모습을 금방 떠올렸다. 그 결과는 다음 방문의 과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장점을 긍정한 현아에게 치료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아이의 부정신념을 완화하는 신념치환 예시

하나, 엄마가 나보고 구제불능이라니 엄마는 정말 나를 싫어해 -> 엄마가 나한테 화가 나서 잠시 그런 말을 담았을 거야.
둘, 우리반 모든 아이들이 나를 돼지라고 생각한다 -> 명수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나에게 잠시 토라져서 일거야.
셋, 나는 너무 뚱뚱해서 인생을 망쳤어 -> 비록 식이조절 실패로 살이 쪘지만 곧 뺄 수 있을 거야
넷, 이제 날씬한 옷들은 영영 입을 수 없어, 저 옷들을 다 버려버릴까? -> 저 옷은 지금 당장은 맞지 않지만 살을 빼고 나면 다시 입을 수 있을거야. 세달 후에 다시 보자.
다섯, 엄마로부터 잘못된 입맛을 물려받았으니 나는 구제불능이야 -> 지금 나의 입맛은 내가 잘못 길들인 탓이야. 두 달만 연습하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

박민수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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