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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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늙은이여 입을 열자

97번째 이야기로 5공 마지막 경제부총리 정인용(67) 대한항공 고문의 외환정책과 함께 한 인생 40년 '외환, 규제서 자유화까지' 를 싣는다.

스스로 '외(外)자 돌림 인생 40년' 이라고 치부하듯 그는 외환관리를 입안했고 결국 외환자유화를 실현한 우리나라 외환 정책의 산 증인이다.

또 1970년대 오일쇼크 때 외자 조달로 국가위기를 넘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97년 외환위기 때는 국제금융대사로 미국.일본.유럽을 돌며 외채 만기 연장을 위해 애썼다.

1980년대 부실기업 정리를 마무리하면서는 '외곬' 관료의 전형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지난해 5월 나는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항암치료를 받느라 전전긍긍한 지난 여름은 내 생애에 가장 긴 여름이었다. 의료계 파업으로 치료 도중 병원을 옮기는데, 마치 생체실험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경과는 다행히 좋은 편이다.

내 나이 이미 예순일곱. 65세 이상 암환자의 5년 생존율은 낮다. 5년 후면 평균 수명, 이러나 저러나 이후의 삶은 어차피 덤이다.

1998년 9월 19일 이후로 나는 유언장을 품고 다닌다. '어떤 식으로든 장례식은 치르지 말고, 시신은 화장해 바다에 뿌려 달라' 는 내용이다.

그 바다가 남태평양이라면 더 바랄 게 없다. 바다는 모든 바다로 이어진다.

훗날 나의 손자들이 어느 바닷가에 이르든 '여기가 바로 우리 할아버지의 산소' 하고 기억하기를 나는 바란다. 그들이 바다에 뛰어들면 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구랍 29일 박봉환(朴鳳煥) 전 동자부 장관이 세상을 떠났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초대 가정교사를 지냈고 재무차관 자리를 내게 물려주었던 고인은 정도를 걸은 공직사회의 한 사표(師表)였다.

경제발전의 일익을 담당했던 당사자들이 하나 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있다. 남은 자들의 몫은 무엇일까? 더 늦기 전에 입을 여는 것이다.

혹시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까, 언론의 눈밖에 나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다 손자들의 눈치까지 보게 된 세대지만 이제 알고 있는 얘기들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5월, 나는 홍콩에 있는 중기개발기금 주석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부동산 개발 등으로 인한 경제의 거품이 빠지면서 태국의 바트화가 폭락한 것은 동남아 외환위기의 전주곡이었다.

우리나라 은행의 동남아 지점 자금담당자들은 그 때 이미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해외에서 돈을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러나 이구동성으로 "우리 은행은 괜찮다" 고 본점에 보고했다. 빗나간 애행심(愛行心)의 발로랄까? 반면 외국 은행에 있는 친구들의 얘기는 달랐다.

"한국 돈이 태국에 무려 50억 달러나 묻혀 있다더라. 문제는 이에 대해 아무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고, 대책도 없다는 것이다. 그 똑똑한 한국의 관료들도 깜깜하다. 그러니 태국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문제 아닌가?"

정인용 <煎 경제부총리> eyewhysy@nownuri.net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 약력
▶1934년 경기 장단生
▶경기고,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52년 한국은행 행원
▶59~81년 재무부 총무과 임시서기로 출발, 외환국장.국제금융국장.국제금융차관보.차관 역임
▶81년 경제기획원 차관
▶83년 외환은행장
▶85년 은행감독원장
▶86년 재무부 장관
▶87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88년 아시아개발은행 부총재
▶98년 국제금융대사, 대한항공 고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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