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자전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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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전 챠이밍량의 '하류'를 처음 보던 날 영화 초반부터 잠에 들었다. 전날의 숙취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기도 했지만 영화의 느린 속도가 화근이기도 했다. 영화의 초반 남자 주인공인 이강생이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잠에서 깨어나 다시 스크린을 쳐다보았을 때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이강생은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몇 초였을까, 아님 몇 분이었을까? 이강생이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은 화면 구도의 어떤 변화도 없이 지속하고 있었다.

그 장면 이후로 다시 잠에 들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여전히 찜찜한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여전히 이강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으니 변한 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느리게 지속하는 것들엔 또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들이 있다. 그걸 가장 잘 일깨워준 감독은 아마 일본의 영화 감독 오즈 야스지로일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볼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은 정물(靜物)이다. 그건 화병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전거일 수 있다. 우리는 정물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부동의 형상 안에 변화가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만춘'에서 부인과 사별한 아버지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거짓말로 결혼을 하겠다고 말한다. 딸은 이미 애인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혼자 살게될 것을 염려해 결혼을 미룬다. 그런 일들 때문에 저녁에 아버지와 딸은 대화를 나누고 한 방에서 잠을 청한다. 미소짓는 딸의 얼굴을 보여주는 장면이 보이고 이어 달빛을 머금고 있는 항아리가 보여진다. 다음 장면에서 딸은 눈물을 흘린다. 항아리는 일종의 정물화처럼 딸의 웃음과 눈물 사이에 삽입된다. 이 변화는 어디서 생긴 것일까?

정물의 외관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형상 안에서 변화가 만들어진다. 정물은 대체로 아주 느리게 지속하는 것들이다. 대부분 일상적인 사물들로 구성된 정물은 실제적 용도와는 무관하게 우리 삶의 구석에 배치되어 있다.

정물화의 원어 'still life'가 비록 '정지된 삶'을 의미하지만 이것이 변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것들은 느리게 지속한다. 그 느림 속에 변화가 있고, 다양한 삶의 무게가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에 삽입되는 정물들은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사물들의 느린 지속을 깨닫게 만든다. '만춘'에서 딸은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다.

'만춘'의 한 장면에서 딸은 애인과 자전거를 탄다. 카메라는 둘의 운동을 쫓아 움직인다. 이 영화에서 대부분의 장면은 고정된 카메라(오즈의 낮은 카메라 위치)로 촬영되었다. 유독 딸이 자전거를 타는 장면에서만 카메라가 역동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이 시퀀스는 전경에 두 대의 자전거가 놓여져 있고, 후경에 둘이 바닷가에 비스듬히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장면으로 끝맺고 있다. 정지해 있는 자전거는 비록 움직이지 않지만, 변하지 않는 형상 안에 또한 운동을 품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는 속도와 정지해 있는 자전거간의 미묘한 균형이 이 장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훌라후프를 돌리는 아이들은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 단지 허리의 탄력만을 사용해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몸의 부동성과 훌라후프의 빠른 속도가 미묘하게 결합한다.

오즈의 영화에서 화면의 느린 속도는 빠른 기차와 또한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동경 이야기'에서 시골과 동경을 잇는 기차가 그렇다. 부언하자면 마치 정물처럼 일본식 집 내부에 놓여진 우산에 대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주 12일부터 서울에서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이 열린다. 영화의 속도와 한계, 삶의 느린 지속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아마 무척 후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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