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⑤월드컵을 준비하는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2002 월드컵축구조직위원회의 홍보실 이지연 과장은 오전 9시 출근과 함께 조직위 홈페이지 `시찰'로 하루를 연다.

지난 10월 홈페이지 한국홍보란에 한국비하 내용이 게재돼 최창신 조직위 사무총장이 경질되는 최악의 상황을 겪은 뒤로는 영문웹사이트 모니터링은 그의 주요업무 중 하나가 됐다.

8월 공채로 조직위에 몸담은 이 과장은 강남의 외국어학원가에서 매월 수강생수백명을 끌어 모으는 등 인기 절정의 토익(TOEIC) 강사였다.

강사경력 10년째인 올해 초 잠시 쉬고 있던 그는 조직위원회의 채용소식을 접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 원서를 내고 시험에 합격,월드컵과 인연을 맺었다.

이 과장은 입사한 지 5개월 남짓 흐른 시간 속에서 능수능란한 영어실력을 통해 외국언론에 대한 조직위의 `입'으로 자리잡았다.

억대 연봉 등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 학원들을 뿌리치고 홍보실을 지키고 있는 그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조직위원회 시설부의 정금영 설비담당관도 한전에서 일하다 지난해 11월부터 조직위에 합류한 또 하나의 숨은 일꾼이다.

1급 전기안전기사인 정씨는 각 경기장의 전기와 관련된 모든 공정의 표준을 제시하고 이행여부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조명탑의 밝기는 고화질TV의 보급을 감안해 국제축구연맹(FIFA)의 제한규정인 1천500룩스를 넘어 2천룩스까지 맞춰야 하고 정전과 같은 돌발상황이 생기더라도 대처할 수 있도록 발전장치를 마련해야 하고.... "

모든 경기장의 전기설비도면이 정금영씨의 머리속에 있는 듯하다.

각 지방 월드컵경기장내에 정씨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며 설비책임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설명회 때문에 잦은 지방출장은 이제 일상처럼 됐다.

경기장시설 면에서 치밀하게 준비해온 일본과 비교해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정 과장을 비롯한 시설부 소속 모든 직원들의 어깨를 짓누르지만 월드컵을 무사히 마치는 날 허리띠 풀고 술 한잔 마실 생각을 하면 어느새 피로가 싹 가신다고 한다.

월드컵 한국의 얼굴이라고 할 상암경기장의 안내를 맡고 있는 사회초년병 오세령(26)씨는 3월부터 내,외국인에게 경기장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 번에 40~50분이 걸리는 풀코스 안내를 하루에 많게는 8차례를 반복해야 하는 고된 일상이다.

한 달여 만에 몸살이 나 5일간 병가를 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일이 무척 재미있다고.

얼마전에는 남미쪽에서 온 방문객들을 안내하다가 되레 1시간동안 `축구과외'를 받았다며 웃었다.

오씨의 피로를 덜어주는 것은 60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들이다.

생업이 있는 50대의 노신사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대가없이 국가적 행사를 돕고 있는 이들을 보노라면 도저히 피곤함을 느낄 수가 없다고 말한다.

5백여일 앞으로 다가온 2002 월드컵축구대회는 이처럼 빛나지 않지만 결코 없어선 안될 숨은 일꾼들의 분주한 발걸음 속에서 차근차근 개막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조준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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