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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버지’ 주인공 전무송이 말하는 이 시대의 아버지

중앙일보

입력

올 4월, 아버지를 소재로 한 연극이 유달리 많다. 늙은 홀아비와 일곱 명 아들들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 ‘봄날’,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다는 아들과 못난 아비라 미안하다는 아버지의 이야기 ‘눈꽃편지’, 그리고 가족에게만은 근사한 아버지이고 싶은 ‘삼류배우’의 이야기까지. 연극 속 아버진 언제나 미안한 존재다. 서글픈 건 이것이 비단 연극 속 허구만은 아니란 것이다.

이 시대 아버지는 늘 그렇다. 자식을 사회에 내보낼 때도, 또 그들이 제 손으로 밥벌이를 할 동안에도 자신은 배경이 돼야 했다. 지난 13일 개막한 연극 ‘아버지’도 그렇다. 해고당한 아버지가 백수인 아들에게 보험금을 물려주려고 자동차 사고를 위장하는 비극이다. 배우 전무송은 83년 해당 극의 원작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아버지 윌리로먼을 연기했고, 2008년까지 같은 역을 네 번이나 맡았다. 그리고 올 봄 다시 연극 ‘아버지’로 돌아왔다. 1983년의 아버지와 2012년의 아버지는 얼만큼 달라져 있을까. 연극이 그리는 이 시대 아버지의 초상이 궁금했다. 배우 전무송에게 만남을 청한 이유다.

‘세일즈맨의 죽음’ 분석하며 아버지 마음 알아

 기자는 “연극을 떠나, 본인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말문을 열었다. 1964년에 데뷔한 그는, 5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회생활을 해온 이 시대의 아버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전씨는 1983년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처음 아버지 역할을 맡았을 때 작품을 분석하면서 느낀 감정을 들려줬다.

 “윌리 로먼은 내 아버지랑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았어요. 내가 연극하는 건 반대하면서도 신문에 내 얘기가 실리면 막 자랑하셨지. 윌리 로먼도 그래. 자식이 바람대로 커주지 않아 못 마땅해하면서도, 우리 아들이 어디 가서 빠지진 않을 거라고 믿어. 작품을 분석하면서야 우리 아버지 마음을 알겠더라고.”

 그 뒤로 30년이 흘렀다. 슬하의 자녀는 어느새 성인이 됐고, ‘할아버지’라는 새 직함도 갖게 됐다. 30년 전에는 이해해야 알았던 윌리 로먼을 그는 이제 공감한다. 그 역시 본인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은 자식들 때문에 실망하고, 분노하고, 애증의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전무송은 차츰 윌리 로먼이 돼갔다.

 그의 직업은 배가 고프다. 때문에 자식만큼은 번듯한 직장을 갖길 바랐다. 하지만 두 아들, 딸이 모두 배우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전무송도, 또 그의 아내도 반대했다. 50년 전, 본인의 아버지가 자신을 그렇게 말렸던 것처럼 오늘의 자신도 아들을 그렇게 말리고 있었다.

 “근데 뭐 애들이 내 말을 듣나. 정중하게 이 직업을 갖고 싶다고 말하길래 나도 진지하게 답했어. 연극을 하려면 제대로 해라. 그렇지 않을 거면 지금 그만둬라. 연극이 무엇을 위해 하는 건지 네 스스로 제대로 공부한 후에 뛰어 들라고. 나는 그 판단이 섰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도 연극을 할거야. 연극이라는 게 인생을 공부하는 하나의 학문인데, 이렇게 훌륭한 직업이 어디 또 있겠어(웃음).”

 아들은 그러겠다 답했다. 아들은 그 길로 예술 대학에 들어갔고 차석을 했으며, 장학금도 받았다. 열심히 활동한다고 돌아다니는 아들이 그는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무대 위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본인과 닮았고 또 좋은 역할만 맡으면 괜찮게 될 놈 같은, 희망적인 배우란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전무송 그 역시 빼도 박도 못하는 윌리 로먼 그 자체다.

가족 해체 현상과 88만원 세대 아픔 담은 작품

 “배우를 시작 한 후로 많은 아버지를 연기했지만 ‘아버지’는 똑같아. 늘 바깥 사람이지. 자식들이 어머니 힘든 건 다 알아.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굳건한 존재로 알더라고. ‘당신은 이 가정의 기둥이다’라고 말 안 해줘도 아버지들은 충분히 자각하고 있어. 그래서 밖에 나가 비극을 당하더라도 참고 산다고. 그런데 요즘 아버지들은 사회에서 너무 많이 치어요. 근 1~2년 사이에 아버지 주제의 연극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이들이 심적으로 의지할 곳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

 그가 이번 작품에서 높이 사는 바는 각박한 사회에 대한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을 한국의 시대상을 반영해 각색한 ‘아버지’는 극 안에 가족해체 현상과 88만원 세대의 아픔을 담았다. 그는 관객이 이 극을 보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길 바랐다.

 끝으로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을 이 시대 아버지들에게 한 마디 전했다.

 “아버지는 어느 시대에나 힘이 들었어요. 어느 시대나 인기 있는 직종은 아니었고요. 허나 힘들고 인기는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는 늘 그 존재에 대해 감사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좌절 마세요. 당신은 부인에게 또 자식들에게 언제나 희망이고, 힘이었습니다.”

<한다혜 기자 blushe@joongang.co.kr 사진="황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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