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화제작]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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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가(collector)
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리스트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자신의 전체 콜렉션을 리스트로 작성해 놓아야 직성이 풀릴 것이고 그리고는 그 안에서 또 자신만의 취향이 깊이 개입된 수많은 하위 리스트들을 작성해 과시욕을 충족하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집가들의 리스트들에는 바로 그들만의 내밀한 역사가 쓰여지게 된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주인공인 롭 고든(존 쿠색)
은 그런 유의 범주에 속하는 인물이다. 어떤 일에 직면해서는 곧장 그와 관련한 톱 파이브 차트부터 '작성'해야 하는 그의 '기질'은 아마도 그가 '챔피언 레코드'(Champion Vinyl)
라는 중고 LP 가게를 운영한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법하다. 레코드를 수집해 가는 과정이란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다 보니 롭이란 이 친구는 이제 자신의 실제 기억에서마저 톱 파이브 차트를 이끌어내 '발표'(?)
하기에 이른다. 이름하여 '이별한 여자들의 올 타임 톱 파이브 차트.' 거기엔 초등학교 시절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을 저버린 여자들이 있었다. 이제 최근 사귄 여자친구 로라(이벤 헤즐)
로부터도 또 거절당하기에 이른 롭은 이 리스트를 가지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의 처지를 따져보기 시작한다. "내가 왜 그녀들로부터 버림받았던 것일까?" 또는 "내가 불행해서 팝 음악을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팝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불행해진 것일까?"

닉 혼비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는 어떤 면에서 롭이라는 이 '수집가'(불행 수집가? 아니면 여자 수집가?)
의 개인적인 리스트에 대한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경로가 확실히 보이는 듯한 '드라마'를 힘겹게 따라가기보다는 롭의 '고백'에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진행되는 편이다. 롭이 자신의 심정에 대해 우리에게 방백의 대사를 주저리 주저리 읊으면 영화는 그 리듬에 맞춰 따라가는 식이다. 그렇게 롭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영화는 우리 자신의 기억을 환기시켜준다. 롭의 생생한 육성을 들으면서 우리 대부분을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 그래, 맞아, 저 녀석은 꼭 나의 다른 모습을 보게 해주는군. 참, 성장이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라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최고의 미덕은 바로 그런 것일 게다. 분명히 그리 별다른 이야기를 하진 않으면서도 우리를 영화 속에 깊숙이 끌고 가는 것 말이다. 영화 속 캐릭터들을 정말이지 꼭 살아있는 인물들인 것처럼 만드는 재주를 통해서. 사실 우리가 롭에게 '매혹'된다면 그건 그가 완벽한 인물, 또는 이상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여자친구인 로라에게 채여서는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갖기도 하고, 또 그녀와 재회해서도 여전히 다른 여자를 곁눈질하는 그 인물이 꼭 살아있는 듯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두 말할 필요 없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는 그래서 매력적인 주인공 롭에게 초점을 맞추는 영화이지만, 다른 주변 인물들에게도 온기를 불어 넣어주는 수고를 잊지 않는다. 롭의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는 두 한심한 청춘들, 즉 너무나 확고한 자신의 음악관(音樂觀)
이 있어 그 때문에 고객을 폭력적으로 대하기까지 하는 배리와 그와는 반대로 소심함의 극치까지 가 있는 듯한 딕 역시 스크린 속에서 충분한 살과 피를 부여받은 것이다.

팀 로빈스가 말총머리를 한 꼴사나운 뉴 에이지 추종자로 나온다든가, 브루스 스프링스턴이 직접 출연해 노래로 롭에게 '충고'를 해 주는 대목도 놓칠 수 없다. 다만 다른 의미에서 놀라운 것은 이 경쾌한 코미디 영화를 만든 이가 '아름다운 나의 세탁소' 같이 진중한 영화를 감독했던 스티븐 프리어스라는 점이다.

원제 High Fidelity 2000년,감독 스티븐 프리어스,출연 존 쿠색, 이반 헤즐, 브에나비스타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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