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아름다운 퇴장’에 재 뿌려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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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김선하
경제부문 기자

“보여 드릴까요?” 환갑의 은행장이 맨바닥에 벌렁 드러눕더니 민망한 자세로 다리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최고경영자의 건강법을 취재하러 간 5년 차 햇병아리 기자 앞에서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5일 그때 왜 그랬느냐고, 체면 깎일 걱정이 안 되더냐고 물었다. “신뢰는 말이 아닌 행동에서 나온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주 41년을 바친 회사를 떠난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 얘기다.

 23일 치러진 퇴임식은 한국 금융계가 그의 아름다운 퇴장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KB·신한·우리금융지주 등 경쟁사 수장이 모두 모여 떠나는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와 인연을 쌓은 각계각층 사람들이 갖가지 사연을 풀어놓기도 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김 전 회장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하나고등학교 학생의 이름을 모두 외고, 성격까지 알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하나금융의 지원을 받은 한 다문화가정의 베트남 출신 어머니는 “회장님, 감사합니다”를 되뇌며 목이 멨고, 그가 멘토 역할을 했던 대학생들은 ‘사부님’의 사랑을 사회에 갚겠다며 기부금 76만원을 모아왔다. 남 몰래 즐겨 찾던 탁구장의 주인은 “늘 혼자 오기에 외로운 노인인 줄 알고 말 상대를 해 드렸더니 어느 날 와인 한 병을 들고 왔더라”며 “노인네가 용돈이나 쓰시지 그랬느냐고 화를 냈다”고 말해 좌중의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모두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가 신뢰를 준 사람들이다.

 ‘승부사 김승유’는 이날 퇴임사를 읽으며 애써 눈물을 삼켰다. “구조조정으로 떠나보내는 직원들이 되레 저를 위로해주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할 때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차라리 속 시원히 울지 그랬느냐는 기자에게 그는 “눈물을 보이면 자리를 떠나는 게 아쉬워서 그런다고 할까 봐 억지로 참았다”고 말했다. “앞으로 하나금융의 경영에 관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25일 충북 진천의 선영을 찾았다. “부모님께 절하고 ‘이제 끝났다’고 인사 드렸다”고 말했다. “중국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이런 김 전 회장을 놓고 아직도 금융권 일각에는 “하나금융의 ‘상왕(上王)’ 노릇을 하지 않겠느냐”며 재 뿌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운 퇴장의 완성엔 아직 한 걸음이 더 남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