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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발전기, 짜내기 가동 … 원전 사고 터질 게 터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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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홍석우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는 과천 지식경제부에는 요즘 비상이 걸렸다.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사고 은폐 사건에 이어 국내 최대인 보령화력발전소 화재까지 잇따라 문제가 생기면서다. 홍석우 장관의 발걸음도 다급해졌다. 그는 17일 보령 화재 현장을 방문한 데 이어 19일에는 다시 월성 원자력발전소를 찾았다. 홍 장관은 “원전은 안전이 최우선”이라며 “종사자들이 치열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터질 게 터진 것”이라는 반응이다. 무엇보다 전력난 방어를 위해 발전소가 쉴 틈 없이 돌아가면서 설비와 조직에 무리가 생긴 탓이란 지적이다. 이른바 메인터넌스(maintenance·유지 보수)의 ‘역습’이다. 가천대 김창섭(에너지IT학과) 교수는 “지난해 여름 비상기간을 거쳐 9월 정전사태로 발전소 보수가 제대로 이뤄질 틈이 없었다”며 “설비는 물론 인력 피로까지 쌓여 사고 발생 가능성이 크게 커진 상태”라고 지적했다. 그는 “발전소뿐 아니라 송배전 설비 등 곳곳에서 문제가 터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수요 급증에 따라 국내 발전소들은 그간 효율 위주의 ‘짜내기’ 운영을 해왔다. 국내 원전의 지난해 이용률은 90.7%에 달했다. 세계 평균(2010년) 79%에 비해 월등히 높다. 이용률은 1년 동안 발전소를 돌린 기간을 말한다. 정부와 한수원은 이용률을 근거로 우리의 원전 관리 능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우수하다고 자랑해왔다. 고장 없이 잘 돌아갔으니 이용률도 높다는 얘기다.

 하지만 고리 1호기 사건은 이런 한수원의 자랑에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고리 1호기의 비상 디젤발전기는 지난달 9일 정전사고 때는 물론 이달 15일 점검에서도 돌아가지 않았다. 조선대 김숭평(핵공학과) 교수는 “안전이 최우선이란 걸 감안하면 이용률이 높다는 게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날림 점검’ 의혹은 한수원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한 관계자는 “과거 원전의 정기 정비기간이 40~50일이었는데 최근엔 20~30일이 됐다”면서 “기간은 짧아지는데 점검할 건 많아지니 작업자들의 집중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역습’은 노후화된 인프라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고리1호기는 국내 최고(最古) 원전으로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설계수명 30년을 채웠지만 10년 연장 운행에 들어간 상태다. “장기부터 심장까지 다 교체했다”는 게 당시 한수원의 설명이었지만 ‘먹통’ 비상 디젤발전기는 34년째 교체되지 않은 상태다. 올 11월 설계수명에 이르는 월성 1호기를 비롯해 국내 원전 21기 중 9기가 20년을 넘어서고 있다. 보령 1호기도 84년 건설돼 올해 28년 된 발전소다. 이번 화재의 원인도 노후한 전력선에서 생긴 합선이나 누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설계수명이란 제한을 두고 대대적 정비를 받는 원전과 달리 화력발전소는 그런 개념조차 없다. 조석 지경부 차관은 “이번 사고를 계기로 전력·가스·석유 등 주요 에너지 시설에 대한 전반적인 안전 점검을 실시하고 화력발전 설비 등에 대한 점검 체계도 재정립할 필요가 있는지 살펴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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