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도 변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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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자유노조 지도자 레흐 바웬사는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아들 녀석을 호되게 두들겨 팬 적이 있다. 날짜를 생각해 보니 노벨평화상을 통고받기 며칠 전이었다" 고 익살을 부려 폭소를 자아낸 적이 있다.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른 가장에게 평화상이라니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다. 평화상을 받고 난 이후 바웬사의 처신과 행태에 실망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폴란드 자유민주화운동의 기수로서 그의 업적과 공헌은 빛이 바랠 수가 없다.

중동에 다시 전운이 감돈다고 1995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의 노벨평화상 공동수상의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는다. 현실로 이루어진 것보다 이뤄가는 과정이 더 소중할 때도 있다.

알프레드 노벨은 "그 전년도에 인류의 이익에 최대 공헌한 사람에게 상을 주라" 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중대 발명과 발견, 화해와 화합을 위한 노력이 어찌 1년 단위로 평가될 수 있으랴. 이 틈바구니에서 수상자 선정을 놓고 시비가 그치지 않았다.

한동안 노벨상은 원로대가들의 연례 ''경로잔치'' 라는 비아냥을 받았다. 각 분야 흘러간 원로들의 ''평생업적'' 자료를 쌓아놓고 재고(在庫) 처리하듯 돌아가며 상을 준다는 얘기였다.

이런 비난을 의식해 젊고 새로운 것, 현재 진행 중인 연구들에 관심이 옮아갔다. 그러나 이 경우 역시 위험부담이 따랐다.

연구업적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데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류의 이익에 별 도움이 안되는 연구로 귀착되는 일도 없지 않았다.

금융투자기법의 이론적 파이어니어로 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한 두 경제학자가 파산한 헤지펀드의 경영진에 몸담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노벨상을 망신시키기도 했다.

노벨상 당국에 가장 아픈 비판은 기초연구에 집착한 나머지 정작 인간의 실생활에 직결되는 엔지니어링분야를 선정대상에서 제외해 왔다는 지적이다.

항공.통신.컴퓨터.로보틱스 등 엔지니어링분야는 노벨상에 도전해 89년부터 드래퍼(Draper) 상을 만들어 2년마다 시상하고 있다.

''과학의 여왕'' 으로 자처하는 수학계 역시 수리공학적 바탕을 강조하며 필즈 메달로 노벨상에 도전 중이다.

노벨상 당국의 고심은 짐작이 간다. 금년도 물리학상 선정은 두가지 점에서 충격적이다. 현존하는 최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를 제쳐놓고 마이크로 칩과 반도체 레이저 광통신과 관련된 실용적 연구가 세명을 수상자로 뽑은 점이 그 첫째다.

"호킹 박사의 연구업적은 엄청난 것이지만 순전히 이론적인 것이어서 실제 자연계에 적용되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다" 는 노벨상 당국자의 설명 또한 이례적이다.

잭 킬비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 입사해 컴퓨터칩을 발명한 때가 58년이 아닌가. 공동발명자의 한 사람인 로버트 노이스는 이미 작고했다. 이들에 대한 시상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물리학상은 오늘의 전자공학, 화학상은 내일의 전자공학에 상을 준 것" 이라는 노벨상 당국의 옹색한 변명에서도 적잖은 변화가 감지된다.

''인류의 이익에 최대공헌'' 을 측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문학상이 더욱 그렇고, 경제학상 역시 수학적 모델에 집착하는 상아탑학자들보다 경제적 복지에 직접 기여한 정책입안가와 기업가.최고경영자.국제금융인 등에게 수여토록 하자는 주장들도 끈질기다. 어떻든 노벨상도 변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상 수상을 놓고 국내적으로 갖은 시비가 끓었었다. 그러나 그의 평화상 수상은 두가지 면에서 요건이 충분했다.

분단 50년 만의 남북한 정상 상봉-이산가족 재회-시드니올림픽 남북한 동시입장-클린턴의 방북 결정으로 이어지는 남북한 화해드라마를 능가할만한 평화이벤트는 지난 1년 동안 없었다.

노벨평화상은 인명을 살상하는 다이너마이트로 돈을 번 데 대한 노벨의 인류에 대한 ''속죄'' 의 뜻도 담겨 있다.

반컵물을 놓고 물이 반이나 찼다며 격려하는 의미가 더욱 크다. 金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와 정치적 입장을 떠나 상(賞) 은 상의 논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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