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 때도 못한 300석 룰을 선수가 만드니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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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28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국회의원 정수를 300명으로 늘리는 공직선거법을 의결했다.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지 13시간 30분 만의 속전속결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가 의석 수를 이렇게 늘려가면 큰일 아니냐”고 말했다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전했다. 이 관계자는 “개정 선거법 처리가 늦어지면 총선 일정에 차질이 생겨 이 대통령이 고심 끝에 처리를 결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새 선거법은 의원 정수에 대한 국민들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무너트렸다는 점에서 파장이 만만찮다. 과거 군사정권이나 3김(金)도 여론을 의식해 넘지 못했던 게 300석이다. 특히 당초 선관위는 20대 국회에선 299석으로 환원하는 단서 조항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했으나, 여야는 이마저 뺀 채 선거법을 통과시켰다. ‘300석 시대’를 고착시키겠다는 뜻이다.

 작업을 주도한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선거구의 선을 긋는 작업을 했다. 국회의원들 스스로 자신의 ‘밥그릇’ 주고받는 일을 하다보니 객관적 기준이나 원칙이 자리 잡을 여지는 없었다. ‘정치개혁’은 간판뿐이고, 실제론 여야의 흥정과 이해타산에 끌려 운영됐다는 것이다. 국회 관계자는 “정개특위는 게임(선거)의 룰을 정하기 때문에 합의 처리가 절대원칙이다. 아무리 타당한 내용이라도 여야 어느 한쪽이 절대 못 받는다고 버티면 폐기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특히 지난해 말 민간인으로 구성된 선거구획정위원회가 권고한 감축 대상 5곳 중 4곳이 자기 당 현역 지역구라는 이유로 새누리당은 처음부터 ‘수용 불가’를 고집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구 1석을 늘리는 절충안은 모두가 만족할 정치적으로 ‘합리적 선택’이었던 셈이다. 협상에 참여했던 새누리당·민주통합당·자유선진당은 각각 자신들의 현역의원이 있는 파주·원주·세종시에서 1석씩 추가로 늘렸다. 감축 대상도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절대 강세지역인 영호남에서 똑같이 1석을 줄여 균형을 맞췄다. 예전 같았으면 여기에서 비례대표를 1석 줄여 전체 의석을 299석으로 맞췄겠지만, 이번엔 통합진보당이 비례대표 감축에 강력히 반발한 게 영향을 줬다. 결국 정치권 모두가 ‘잃지 않는 게임’을 하다 보니 의석 수 증가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여론은 성토 일색이다. 인터넷 공간에선 “의석을 확 줄여도 시원찮을 판에 웬 혈세 낭비냐”는 비난이 넘쳐난다. 정치권의 신뢰 상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는 식으로 운영되는 현행 선거구 획정 시스템 자체를 확 뜯어고쳐야 한다는 주장도 거세지고 있다. 서울대 강원택(정치학) 교수는 “현재 국회의장 산하기구인 선거구획정위를 독립기구로 만들고 선거구 획정에 강제력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특정 정당·후보에게 유리하도록 부자연스럽게 선거구를 획정하는 행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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