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스타검사가 사라진 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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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사회부문 부장

특수부 검사 문세영. 그가 지난해 10월 쉰여섯에 세상을 떠났다.

 빈소를 찾았을 때 문상 접수대에 초로(初老)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그와 일했던 검찰·경찰 수사관, 구청 파견 직원 등이 만든 ‘내 사랑 내 곁에’ 회원들이었다. 문 전 검사가 1996년 교통사고로 투병생활에 들어가 검찰을 떠난 후에도 변함없이 그의 곁을 지켜왔다.

 그들을 형제애로 뭉치게 한 건 정의감과 열정이었다. “검사님께선 철저하게 자료 분석을 한 다음 수사에 착수하셨습니다. 무죄로 나온 게 한 건도 없었지요.” “사나흘씩 밤을 새웠지만 그땐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수사 끝나면 멸치 안주에 폭탄주 돌렸어요. 그 흔한 스폰서 하나 두지 않으셔서….”

 충혈된 눈에서 ‘일벌레’(문 전 검사 별명)와 한 시절을 함께했다는 자부심이 일렁였다. 문세영은 “돈 없어서 특수부 못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집을 변두리로 옮기고 남은 돈 2000만원을 수사비로 썼다. 수사가 가야 할 길을 아는 ‘눈 밝은 검사’와 베테랑 수사관들은 사회의 그늘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서방파 두목 김태촌 등 16개 폭력조직 두목 구속, 방송사 PD 비리, 예·체능계 입시 부정, 미스코리아 선발 비리….

 문세영이란 잊혀진 이름을 떠올린 것은 검찰의 오늘을 지켜보면서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이 맡았던 ‘선관위 디도스 공격’ 수사가 지난달 범행 배후에 대한 의혹을 남긴 채 마무리됐다. 한나라당 돈 봉투 사건 역시 국회의장과 청와대 정무수석은 구속을 면하고 ‘깃털’인 당협위원장만 구속 기소됐다.

 “디도스 범행의 배후를 밝히는 건 신의 영역이다.” “박희태 의장을 기소할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법원 판단을 구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두 사건 모두 어정쩡한 부연 설명이 붙었다. 검찰 주장대로 “정치적 고려가 없었다”고 한다면 수사 역량이 미치지 못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특수 수사는 살인이나 강도처럼 직접적인 피해자는 없지만 국익과 직결되는 거악(巨惡)에 맞서는 일이다. 작은 실수나 한순간의 판단 착오가 검찰 전체의 신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수사 착수 전까지는 치밀함과 신중함이, 착수 후에는 스피드와 멈출 줄 아는 결단력이 요구된다. 말로는 쉽지만 다년간의 수사 경험 없이는 지키기 힘든 원칙이다.

 그런데 그간 정권 교체를 거치며 경험 많고 강단 있는 특수부 검사가 잇따라 퇴장했다. 어느 지역, 어느 대학 출신인지에 따라 주요 수사 라인이 바뀌고, ‘균등한 기회를 준다’는 명분 아래 순환 보직 원칙이 강조됐다. 특수통이 떠난 자리는 기획통이나 무난한 인물로 채워졌다. 뒤이어 부장검사가 팀장을 맡고 검사들이 조사를 나눠 맡는 팀제 수사 방식이 도입됐다. 상부의 통제와 정보 보안이 강화된 대신 검사 한 사람이 기량을 시험할 여지는 좁아졌다. 베테랑 계장(수사관)들은 조사 과정에서 배제됐다.

 이런 가운데 현 정부 들어 불거진 ‘이중 잣대’ 시비로 정치검찰의 이미지는 더욱 부각됐다. 권력형 비리 의혹 앞에선 맥을 못 추고 야권 인사는 기소하는 일이 반복됐다. 막상 재판에 들어가서는 변호인단의 화력(火力)에 밀려 무죄가 선고됐다. 서초동 밖에서의 힘이 비대해진 만큼 서초동 안에서의 힘은 부실해진 것이다. 수사의 성패 역시 사람에 달렸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이기도 했다.

 선거의 계절을 맞은 지금, 제1야당 대표(한명숙)와 유력 대선 주자(문재인)는 “검찰 개혁이 최우선 과제”라고 공언하고 있다. 태풍의 눈이 검찰 조직을 향해 다가오는 형국이다. 이제 특수 수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절체절명의 과제다. 제대로 수사할 사람을 키우고 그들에게 온전히 힘을 실어줘야 한다. 말 그대로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 존재 의의를 입증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외부로부터의 개혁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문세영의 꿈은 “우리 사회에서 페어플레이를 깨뜨리는 범죄 행위를 지속적으로 단속하는 것”(93년 인터뷰)이었다. 그의 동료·후배 검사들도 그 각오만은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