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욱의 경제세상] 한·중 FTA, 다음 정부로 넘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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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입장부터 먼저 밝힌다. 나는 민주통합당의 FTA 재(再)재협상이나 폐기 운운은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한다. 한·미 FTA가 설령 우리에게 대단히 불리한 협정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FTA는 다음 달 15일 발효되며 이제는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재재협상은 미국이 들어줄 리 만무하다. 그래도 하겠다면 다음 수순은 폐기다. 만일 폐기되면 그 후유증과 부작용은 실로 엄청날 것이다.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이고, 보복성 무역압력을 가할 힘은 충분하다. 게다가 미국은 지금 보호주의 유혹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한·중·일 등 동북아 세 나라에 대한 불만도 상당한 터다. 우리가 미국보다 이익을 덜 보더라도 한·미 FTA를 체결해야 하는 이유다. 한·미 FTA에 기대하는 것도 큰 걸 잃지 않기 위해 작은 걸 양보하는 방패막이 역할이다. 민주당의 말 바꾸기도 물론 잘못됐다. 정부·여당이 민주당의 신뢰성과 무책임성을 지적하는 건 옳다. 민주당이 재재협상을 요구하는 10개 조항 중 9개가 자신들이 집권할 때 타결됐던 것이라는 주장도 맞다. “여당 했을 때 말 다르고, 야당 했을 때 말 다른 행태는 바로잡겠다”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말에도 공감 간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명박 대통령과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민주당 탓’하는 건 문제 있다는 생각이다. 한·미 FTA에 관한 한 큰소리칠 입장이 못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말 바꾸기라고? 이 정부도 오십보백보다. 입만 열면 “재협상이 아니라 추가 협상”이라고 호언했다. 문제 있는 부분을 고치는 작업이지, 2007년에 체결된 기존 합의의 내용 자체를 수정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협정문은 단 한 글자도 고치지 않겠다며 큰소리쳤다. 그런데 결과는? 김 본부장이 국회에 나와 “재협상은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 (지키지 못해) 대단히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더 문제는 이 정부의 협상 전략이다. 한·미FTA처럼 큰 협상을 하면 나라가 시끄러워지는 건 당연하다. 그럴수록 정부는 반대론자들을 잘 다독여야 한다. 갈등을 해소하면서 국민 의견을 하나로 결집해야 한다. 그게 정부가 해야 할 기본 책무다. 더욱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전략이기도 하다. 힘 약한 우리로선 내부 역량을 한 군데로 모아야 미국과의 협상에서 꿀리지 않기 때문이다. 협상론에서도 외부협상보다 국내 의견을 조율하는 내부협상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그러려면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 재협상을 왜 하는지, 협상 경과는 어떤지, 성과는 무엇인지를 밝히고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거꾸로였다. 비밀주의로 일관했다. 최고책임자인 통상교섭본부장이 직접 협상을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실무협의일 뿐이라고 연막을 쳤다. 협의 내용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때도 야당은 반대했다. 협상 내용을 공개하라고 했다. 재협상을 한다면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등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도 같이 개정하자고 주장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재협상을 할 거면 우리에게 불리한 것도 같이 재검토해야 했다. 국회 비준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야당을 설득할 정도의 재협상을 끌어내야 했다. 반대론자들을 설득하고 달래는 데도 정성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이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타결 이후 ISD 문제가 심각한 파장을 일으켰고, 야당이 터무니없는 FTA 폐기 운운하는 데는 이 이유가 크다. 이유는 둘 중 하나지 싶다. 국민과의 소통을 우습게 보는 오만함 때문이거나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만 급급해 내용보다는 협상 타결 그 자체를 중시했거나.

거듭 말하지만 민주당의 한·미 FTA 폐기론은 철회돼야 한다. 하지만 민주당이 이렇게 된 데는 정부 책임도 크다. 그런데도 남 탓만 할 뿐 자기 잘못은 보지 않는다. 재재협상을 요구하는 10개 중 9개는 민주당 집권 시 타결된 것이라고? 맞다. 그러나 어쩌랴. 이 말이 마치 “노무현 정부가 했으니 우리는 책임 없다”는 식으로 들리니 말이다. 중국과의 FTA를 서두르겠다는 정부가 영 미덥지 않은 또 다른 이유다. 한·중 FTA는 차기 정부로 넘겨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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