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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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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호 12면

사랑한다는 뜻으로 두 팔을 머리 위로 동그랗게 말아 하트 모양을 만드는 행위는 낯설지 않다. 연예인은 물론 정치인, 여자, 남자, 어린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누구나 이 포즈를 취한다.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사랑’을 뜻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이 사랑의 표현이 빠르게 또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었던 것은 그 표현의 긍정적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심장의 모양과 색을 양식화된 기호로 표현한 붉은 하트 모양은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그 누가 ‘사랑한다’는 표현을 싫어할 수 있겠는가.

김신의 맥락으로 읽는 디자인 <3> 하트

오늘날 하트 기호는 사랑을 뜻한다. 그러나 서구에서 심장을 뜻하는 하트(heart)라는 단어가 처음부터 사랑을 상징하지는 않았다. 영어에서 하트는 사람의 성품과 관련된 형용사에서 주로 사용된다. warmhearted(친절한), hard-hearted(매정한), heartless(냉혹한). 또 감정이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다양한 관용 표현에서도 하트가 쓰인다. His heart is made of steel(그는 감심장이야), Don’t take it to heart(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Let’s have a heart-to-heart talk(터놓고 이야기하자), have our heart in our mouths(겁에 질리다), have a big heart(너그럽다), learn by heart(외우다), heartbreaking(마음이 찢어지는). 이처럼 하트는 우리말 심장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

우리말에서도 “심장이 오그라든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심장이 뛴다” “강심장”과 같은 표현이 있지만 대개는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대상, 즉 몸의 장기를 말하거나 세상의 중심, 살아 있음, 무서운 감정을 표현하는 정도다. 왜냐하면 영어의 하트는 우리말에서 ‘마음’ 또는 ‘가슴’이라는 단어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우리말의 마음과 가슴을 모두 포괄하는 영어의 하트는 수많은 상징성을 갖는다. 영혼·양심·열정·용기·정신·이성·고통·수치·연민과 같은 다양한 뜻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하트가 쓰인다. 학자들에 따르면 12세기께 하트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남녀 간의 사랑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우리말 심장이나 마음, 가슴과 다르게 서구의 하트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바로 하트 ‘이미지’다. 13세기에 그려진 프랑스의 태피스트리를 보면 남자가 손에 붉은 하트를 들고 여성에게 건네는 장면이 있다. ‘사랑의 헌납’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작품에서 하트는 남성의 욕망에서 정신적인 측면인 영적 정열을 의미한다. 기사도 정신이 널리 퍼진 중세 때 사랑은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이 당시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는 뜻으로 “심장을 교환한다”는 표현이 문학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여기에서 심장은 장기가 아니라 사랑의 상징인 것이다.

사랑의 상징으로서 하트 이미지가 폭발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다. 산업사회의 대량생산이 물질적 풍요와 소비주의를 낳게 되자 과거 정신적 사랑의 상징이었던 하트는 현대의 수많은 상품처럼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대량 소비되는 하트는 쾌락의 상품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하트 모양의 욕조, 사탕, 안경, 목걸이, 열쇠고리, 쿠션, 액자, 식판, 심지어 재떨이까지. 이런 상품들에서 격조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방송과 광고·만화에서도 하트는 사랑을 표현하는 노골적이고 유치한 방법으로 쓰이곤 한다. 사랑에 빠진 어떤 사람의 눈을 붉은 하트로 대체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현대의 다양한 하트 표현 가운데에서 가장 성공적인 하트는 바로 뉴욕의 상징인 ‘I ♥ New York’의 바로 그 하트다. 뉴욕을 상징하는 이 로고의 하트는 20세기 매스 미디어가 낳은 최고의 히트작이다. 뉴욕시를 상징하고 있는 이 로고는 원래 뉴욕주의 상징으로 만들어졌다. 1970년대 중반 뉴욕주는 관광지로서 별 인기가 없었다. 거의 10년 동안 관광 수입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 뉴욕주 상무부(New York State Department of Commerce)는 1975년 관광 수입 극대화를 위한 광고 캠페인을 시작하기로 한다. 그리고 뉴욕에 근거지를 둔 뛰어난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밀턴 글레이저에게 로고를 의뢰한다.

글레이저는 이 캠페인이 길어야 한두 달 갈 것으로 보았다. 무엇보다 공공의 일이어서 무료 봉사로 일을 해주었다. 그는 버지니아주가 1969년부터 내걸었던 관광 슬로건인 ‘Virginia is for Lovers(연인들을 위한 버지니아)’로부터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았다. 이 슬로건의 로고에는 빨간색 하트가 그려져 있다. 이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love라는 글씨 대신 빨간색 하트가 강렬하게 들어간 ‘I ♥ New York’ 로고가 탄생한다.

광고 대행사인 웰스 리치 그린(Wells Rich Greene)이 뉴욕주를 위해 전개한 ‘아이 러브 뉴욕’ 광고 캠페인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광고 집행 1년 뒤 뉴욕주 관광 수입이 1억4000만 달러 증가했다. 고무된 뉴욕주는 광고 예산을 두 배로 늘리고 광고는 무려 10년간 지속됐다. 뉴욕의 하트는 미디어를 타고 전 세계로 퍼졌다. 글레이저는 이 거창한 캠페인으로부터 돈 한 푼 못 받았다. 대신 자신의 작업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을 남기는 데 만족해야 했다.이 로고는 뉴욕에서 티셔츠로 만들어져 불티나게 팔렸다. 물론 대부분의 티셔츠나 기념품이 정식 라이선스를 받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로고 이미지가 퍼지자 이를 모방하는 사례 또한 무수히 나타나면서 미국 대중문화 아이콘 중 하나가 되었다. ‘I ♥’로 시작해 목적어 이름만 바꾼 수많은 모방 사례가 잇따르자 정식 라이선스를 받고 티셔츠를 생산하는 의류 회사들은 매년 이를 막으려고 수많은 소송을 하고 있다.

20세기의 하트는 산업사회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속에서 과거에 가졌던 열정과 사랑이라는 의미를 넘어 쉽게 내뱉고 취할 수 있는 것으로 격이 떨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사랑은 한 세대 전만 해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아버지가 자식들을 염려하고 생각한다는 의미로 쓰였고, 그마저도 굉장히 아껴서 쓰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사랑이라는 말은 팔로 하트 만드는 몸짓과 함께 기업과 정치인·연예인들이 대중을 향해 외치는 구호로까지 쓰이는 흔해빠진 표현이 돼버렸다. 서구에서 온 하트 이미지는 이렇게 강력하게 우리 삶을 변화시켰다.


김신씨는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7년 동안 디자인 전문지 월간‘디자인’의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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