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안 된 은퇴 … 생각하면 골치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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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모(49)씨는 1991년 ‘잘나가는’ 대기업 자동차회사에 취직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 때였다. 생활은 넉넉했고 곧 가정도 이뤘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모든 것을 앗아갔다. 98년 정리해고된 정씨는 건설일용직을 전전했다. 가정도 엉망이 됐다. 아내는 대형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학에 들어간 첫째는 1년 만에 휴학을 해야 했다. 정씨는 요즘 전 직장의 하청업체 비정규직으로 일한다. 외환위기 때 살아남은 옛 동료(정규직)가 받는 월급의 30%를 받는다. 그는 은퇴 이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말한다.

 신모(51)씨는 6년차 은행지점장이다. 상고 졸업 후 입사한 첫 직장에서 32년째 일하고 있다. 동기 중에서 승진이 가장 빠르고 실적도 상위권이다. 하지만 퇴직만 생각하면 골치가 지끈거린다.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모아놓은 것도 아니어서다. 정씨는 그래서 요즘 “ 승진을 안 하고 계속 지점장으로 남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행장까지 오르지 못한다면 본부장이 돼봐야 정년만 짧아지기 때문이다.

 21일 한국고용정보원이 펴낸 ‘베이비붐 세대의 직업 생애사와 고용정책’ 속에 담긴 우리 시대 베이비부머(1955~63년생)들의 자화상이다. 이 책은 베이비부머 25명을 심층면접한 결과를 담았다. 기업 대표부터 교수·용접공·경비까지 표준직업 분류상 대분류에 속하는 직업 종사자를 모두 만났다. 면접 시간은 최대 2시간30분. 베이비부머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경우는 많았지만 심층면접으로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본 연구는 드물었다.

 ◆‘일 중독 세대’에서 ‘벼락 맞은 세대’로=한국 경제가 성장하던 1970년대 말~80년대 초 취직한 베이비부머들은 ‘죽기 살기로’ 일했다. “매일 밤 11시까지 정산을 하고, 집에 들어가면 (새벽) 1시였다.”(허모씨·56·금융안전회사 비정규직) 정시 퇴근은 금기, 주말 출근은 예사였다. 하지만 외환위기 후 모든 게 달라졌다.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이 속출했다. 쫓겨난 베이비부머들은 앞다퉈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또 잘리기 싫어서”(이모씨·57·대기업 하청업체 단순노무직)였지만 사업은 줄줄이 실패했다.

 ◆“회사는 회사, 나는 나”=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베이비부머들은 한국 사회의 중추로 성장했다. 선배와 동료들이 대거 퇴출된 탓에 이전보다 ‘고속 승진’ 기회가 더 많았다. “(이전까지) 한 번도 그런 기회가 오리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던 현실이 펼쳐졌다.”(옥모씨·50) 하지만 이들도 일과 회사에 대한 인식은 달라졌다. “내가 있음으로 이 회사가 어떻다는 것은 내 착각이다. 나는 나름대로 내가 먹고살 길을 찾아야 되겠구나”(신모씨·56·은행 감사)하는 자각이었다.

 ◆대부분 노후대책 못 세워=은퇴를 앞둔 베이비부머들은 계속 일하고 싶어 한다. “지금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데, 기회를 안 주니 안타깝다”(허모씨·56)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정작 창업·재취업 등 체계적인 은퇴 준비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항상 생각은 하는데 답은 없다”(옥모씨·50)거나 “직장생활을 하며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모씨·57)고 말한다. 노후를 준비하기 힘든 현실을 외면하는 ‘현실회피형 무(無)계획’ 유형도 있다. “퇴직하고 나면 한 달에 얼마가 있어야 하나, 그걸 따지면 머리가 아프다. 회피하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든다”(장모씨·53·증권회사 출신으로 현재 공기업 경비)는 식이다.

 한국고용정보원 황기돈 선임연구위원은 “베이비부머들마다 살아온 인생사와 직업 경험이 모두 제각각”이라며 “‘제 2의 인생’을 연착륙시키기 위해선 각자의 유형에 맞는 ‘맞춤형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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