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유키 후쿠모토 〈도박묵시록 카이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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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지 공포

대학을 졸업할 무렵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기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무엇인지를 얘기한 적이 있다. 〈도박묵시록 카이지〉를 보면 어렸을 적부터 막연히 쌓아온 귀신에 대한 무서움과는 다른 차원의 공포에 압도된다.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다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생활. 잘난 부모, 그럴듯한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막막한 상황을 버텨나갈 만한 심지마저 없다.

남들이 좋은 차 굴리는 거 보면 마구마구 배가 아파 오기 시작하고, 차곡차곡 개미 마냥 돈을 벌어가는 것은 너무나 쪼잔하고 뭔가 멋지게 살아보고 싶기는 한데...

이렇게 그냥 저냥 방바닥을 마구 뒹굴던 어느 날 카이지에게 고리대금업자가 평생 뼈빠지도록 일을 해야 만질 수 있는 거액을 갚아야한다는 말과 함께 나타난다. 몇 푼 안 되는 돈의 빚보증으로 인해 이자가 이자를 낳는 상황에서 결국 원금의 몇십 배가 되는 돈을 갚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부하고 싶은 아득한 현실속에서 구질구질하게 이자에 허덕이는 것보다는 '에스프와르호'라는 도박선을 타서 산뜻하게 일을 해결하는게 낫다는 고리대금업자의 말은 너무나 그럴 듯하다.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라는 것은 무섭고 두렵기 때문이다. 적당한 자기 최면들 속에서 막연히 더 나은 날을 기대하며 사는 이들은 쨍하고 해뜰날이 오지 않는다는 것에 쉽게 삶을 포기해버릴 뿐이다.

나 이외의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젊은이들이 얼마간의 빚에 시달리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는 주최측의 말은 '너희들은 너무 쉽게 살아 왔다'는 윽박지름으로 순식간에 돌변하며, 분위기는 살벌해지고 배 안은 살육의 전장이 된다.

계속되는 사기와 음모와 배신 속에서 카이지는 혼자의 힘으로 살아남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을 모아낸다. 게임이 종반전에 치닫게 되자 전략상 카이지는 같은 팀에게 모든 권리를 양도하고, 패자들이 모인 곳으로 향한다.

함께 있었다는 기쁨도 잠시, 카이지는 상대방의 눈물 섞인 '구해줄께요'라는 목소리가 너무 멀리 들리게 됨을 알게 된다. 이것은 이미 예고된 배신이였을까, 정말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끝이 없는 걸까?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들이 계속 되고, 내게 우호적이었던 행동이 나를 이용하기 위한 하나의 제스쳐라는 사실들만 확인하게 된다. 배신감을 넘어서는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 가까이에서 맛볼 수 있는 공포는 반복된다.

좀더 잔인하게 좀더 엽기적으로

너희들은 쓰레기라고 이건 현실이라고 냉엄하게 꾸짖는다. 너희들이 쓰레기가 된 이유는 쉽게 판을 포기하고 다시 시작하면된다 라는 안일한 사고 방식들로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 안일함을 넘어서는 것은 인생에서 실패한 자의 추함, 땅위를 꾸물거리며 몸부림치는 것을 여유롭게 관망하기 위함이다.

20미터 위의 건물 사이에 놓여진 가느다란 철구조물을 건너게 된 후 받게 되는 거액의 돈. 이 구조물을 건너는 것은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은 그나마 인간적인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제물이었고 그것은 피를 즐기는 향연-서서히 죽어가는 인간의 모습. 죽음 앞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삶을 향한 몸부림들을 즐기는 것-이었다.

벼랑 끝에 매달린 힘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며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한 안정감을 통해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이다. 잔인함들을 즐기는 광기어린 시선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실험용 쥐를 미로속에 가둬두고 이리저리 부딪히고 다니는 꼴을 팔장끼고 지켜보는 잔인함이고 시대의 부조리와 비리를 참상들을 알린다는 목적하에 좀더 엽기적이고 끔찍한 장면들만을 찍어대느라 정신없는 카메라의 시선과 그것을 보면서 남의 개인적 불행의 강도가 세어질수록 문제의 심각성이 더 강하다고 느끼는 말초적 자극들에 무뎌진 우리의 두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무서워진다.

어쨌든 나는 살아남야만 한다

철근 구조물위에서 먼저 출발한 순으로 순위가 정해지는 상황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라, ~어라, 밀어라'가 멀리서 들려오고 나의 엿같은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밀어야만 한다. 울면서 '미안해 하지만...' 하면서 상대방의 피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박판의 경쟁과 짓밟음 등의 잔인함들과 교차되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경쟁의 원리는 잔인하다. 하지만 이미 현실의 추악함 속에서 어정쩡한 판전승을 거둬온 사람들의 기억속에는 추상적인 현실의 끔직함보다 구체적인 마음의 상처들이 또렷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떠들다가 걸려서 둘이서 마주본 채 서로의 뺨을 때리게 하는 벌을 받던 학교 때의 기억. 맨처음엔 헤헤거리며 웃다가 어느새인가 '미안해 살살-' 하면서 울면서 서로의 뺨을 때리며 없던 감정마저 실어버리게 되는 참혹함들.

아마 이것이 '내가 살기 위해 널 죽여야하는' 첫 번째의 학습일 것이고, 사람들은 믿을 게 못 되고 인간은 정말로 비열하고 구차한 존재라는 것을 지울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되는 역사적인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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