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57) 마오쩌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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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초기 중공의 기층 세력은 거의가 도시노동자였다. 도시를 포기하고 농촌을 근거지로 삼자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색채가 변했다. 토호들의 땅을 몰수하고 토지를 재분배하다 보니 뭐든지 평등해야 한다며 ‘평균주의’라는 말까지 등장했다.도시 입성 후에도 농촌에서 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원자재를 몰수하고 공장을 폐허로 만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스자좡(石家庄)을 점령한 후에는 빈민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며 사유재산까지 닥치는 대로 강탈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몇 명을 총살시키고 계엄령을 선포한 후에야 사태가 가라앉았다.

국공전쟁 말기, 텐진에는 4만여 명의 공상업 종사자와 10만여 명의 공장 노동자가 있었다. 베이핑은 텐진의 3분의 1 정도였다. 먹고 마시는 것을 비롯해 입고, 신고, 닦는 것 모두를 이들에게 의존했다. 그만큼 생산과 공급 능력이 뛰어났다. 1949년 1월, 인민해방군이 텐진과 베이핑을 장악했다. 텐진시 군관회와 시정부는 출범 몇 개월이 지나도록 공장주들에게 뭘 어떻게 하라거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자본가들과 접촉했다가 무슨 날벼락을 맞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공장주를 상대로 경영 참여와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끝장을 보자며 청산(淸算)투쟁도 벌였다. 불과 한 달 만에 58개 공장에서 청산투쟁이 벌어졌다. 텐진일보를 비롯한 언론기관도 허구한 날 자본가들을 착취자라며 매도했다.

자본가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청산투쟁을 두려워하고, 공산당이 노동자들의 이익에만 치중할까 봐 겁을 냈다. 앞으로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공장 가동을 중지하고 생활필수품을 시장에 풀지 않았다. 시설을 남쪽으로 이전하거나 재산을 정리해 홍콩으로 향하는 자본가들이 속출했다. 노동자들은 태연했다. “도망가게 내버려둬라. 공장문을 닫아도 상관없다. 우리가 힘을 합쳐 운영하면 된다.”

같은 해 4월, 중공 화북국 서기 보이보(薄一波·박일파. 현 충칭시 서기 보시라이의 부친)가 중앙에 두 도시의 생산력 저하와 물가 폭등, 생활필수품 부족, 노사관계를 우려하며 자본가들의 정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몇 달 전 마오쩌둥은 보이보에게 “도시를 접수할 때 관료자본은 몰수해라. 공상업 종사자들은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 건드리지 말고 원상태 그대로 놔둬라”면서 좌경풍조가 성행할 것을 우려한 적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2인자 류샤오치에게 “지금 우리는 자본가들과 단결해야 한다. 동지들이 감히 말을 못하지만 자본가가 없으면 되는 일이 없다”며 해결을 위임했다.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이 농촌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동안 도시에서 활동한 노동운동과 지하공작 전문가였다.

두 사람은 동향(同鄕)이었다. 평지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 남쪽이 마오쩌둥의 고향이고 류샤오치는 서쪽 마을에서 태어났다. 거리는 9㎞ 남짓했다. 땅 덩어리가 큰 나라이다 보니 이 정도면 한동네나 마찬가지였다. 나이는 마오가 5살 많고 키도 2㎝ 더 컸다. 두 번째 부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도, 세 번째 부인과 헤어진 사연도 비슷했다.

텐진에 온 류샤오치는 간부들, 특히 노조 간부들을 모아놓고 좌경화를 비판했다. “자본가들은 투쟁대상이 아니다. 쟁취대상이다. 합작과 투쟁을 병행해야 한다. 투쟁만 하고 합작을 거부하는 것은 착오다. 합작만 강조하며 투쟁을 뒤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류샤오치는 대자본가와 중소기업인들도 만났다. 중국 현대사에 텐진강화(天津講話)로 기록될 엄청난 발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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