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 비관론자의 ‘헛스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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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이성한
국제금융센터 소장

세계 금융시장에 대한 전문가의 비관적 전망이 연초부터 빗나가고 있다. 해외 투자은행과 주요 외신이 ‘상반기 약세, 하반기 회복’을 전망했던 것과 달리 올해 세계 증시는 2월 초까지 큰 폭으로 올랐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9조6000억원어치의 주식을 팔았던 외국인이 한 달 반 동안 8조8000억원어치를 되샀다. 두 달도 안 되는 기간만 놓고 전망의 옳고 그름을 논하긴 어렵다. 하지만 세계 주가가 1월에만 5.8% 상승하며 18년 만의 최대 오름폭을 기록한 것은 비관론자는 물론 낙관론자의 예상 범위까지 훌쩍 뛰어넘은 수준임에 분명하다.

 단기든, 장기든 금융시장이 ‘전문가의 예측’을 벗어나 널뛰기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요즘처럼 세계 경제의 펀더멘털과 금융시장의 움직임이 제각각의 신호를 보낼 때는 미래를 예측하기가 더 어렵다. 최근 해외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유럽·미국의 정책 및 주식시장 시나리오’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지난 50년의 데이터를 살펴볼 때 미국의 경제성장률과 주가수익률의 상관관계가 거의 ‘제로’로 수렴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수치의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성장률과 주가가 서로 거꾸로 움직인 때가 상당 기간에 이른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제 상황 자체를 예측하기도 어려운데 경제 여건을 기반으로 금융시장 전망을 해도 들어맞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전문가가 여전히 낙관론과 비관론으로 나뉘어 경제·금융시장 전망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은 과연 맞지도 않을 전망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사람일까.

 1979년부터 87년까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지낸 폴 볼커는 2004년 8월 “앞으로 5년 안에 금융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75%”라고 경고했다. 이듬해 4월엔 워싱턴 포스트에 ‘얇은 얼음 위의 경제(An Economy On Thin Ice)’라는 제목의 기고를 통해 “미국 경제는 점점 얇아지고 있는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미 주가와 부동산 가격은 볼커의 경고가 나온 뒤에도 한동안 계속 올랐다. 부동산 가격은 2006년 7월까지 계속 상승했고, 주가도 2007년 10월 말까지 30%가 더 뛰었다.

 상황은 2008년 들어 완전히 달라졌다. 세계 금융위기 속에서 미국의 주가는 고점에 비해 51% 빠졌고, 경제는 대공황 이후 가장 긴 18개월 동안 침체의 수렁에 빠졌다. 시차는 조금 있었지만 볼커의 경고가 들어맞은 셈이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8년간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신임을 받았던 81세의 볼커는 공직을 떠난 지 21년 만에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의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의장으로 복귀해 이른바 ‘볼커 룰’로 불리는 은행 개혁법안을 만들어 놓고 지난해 1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주가가 거침없는 상승세를 지속한 3년여 동안 볼커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달라진’ 경제 구조와 게임의 법칙을 파악하지 못한 퇴물 취급을 당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제 상황에 관계없이 금융시장에 대한 상반된 시각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낙관론과 비관론으로 부르든, ‘탐욕과 공포’로 표현하든 결국 같은 얘기다. 비관론자가 낙관론자에 비해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긍정적 정보보다 부정적 정보에 사람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정성 효과’도 분명 존재한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비관론을 펴는 사람도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비관론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불편’을 감수하고 건강한 비관론자의 견해에 기꺼이 귀를 열어야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에 조금이나마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를 가르고 뇌를 여는 수술이 아니라 생사를 넘나드는 단계까지 가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의술인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미래 예측이 어려운 건 지금 그렇다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볼커의 사례에서처럼 통찰력 있는 진단이 현실화되기까지 상당한 시차가 존재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열 번의 잔파도에 대한 전망이 빗나가더라도 한 번의 쓰나미를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비관론자의 ‘헛스윙’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현실에 대한 차가운 직시에서 나오는 건강한 비관론은 지금은 불편함을 안겨줄지 몰라도 미래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적어도 덜 차가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이성한 국제금융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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