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37) 외환은행 <1> 독이 된 약사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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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한복판에서 외환은행은 독일 코메르츠은행으로부터 3500억원의 외자를 유치한다. ‘가뭄에 단비’로 여겨졌던 이 외자는 그러나 외환은행 구조조정에 되레 걸림돌이 된다. 1998년 7월 28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자본 참여 계약식. 왼쪽부터 코메르츠은행 위르겐 레머 국제담당 전무, 마틴 콜하우센 행장, 외환은행 홍세표 행장과 조성진 전무. [중앙포토]

홍세표 외환은행장은 당당하게 내 사무실 문을 열었다. 1998년 5월 초, 금융감독위원회가 본격적인 은행 구조조정을 코앞에 둔 때였다.

 “코메르츠가 계약서에 서명하기로 했습니다.” 독일 코메르츠은행. 당시 세계 30위 안에 드는 우량 은행이었다. 총자산이 2800억 달러니 당시 환율로 400조원에 가까웠다. 이런 은행이 외환은행에 2억5000만 달러(약 35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 외환은행과 거래해 온 코메르츠는 “한국 경제의 저력을 믿는다”고 했다. 역시 독일 은행이었다. 어려울 때 의리를 지킨 것이다.

 그때 외자 유치는 시대적 강박관념이었다. 오죽하면 ‘외환위기’라 불렀을까. “살길은 외자뿐”이라고 믿던 때였다. DJ가 대선 승리 후 첫 기자회견에서 강조한 말도 “투자 여건을 개선해 외자를 적극 유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외자에 목말라할 때 홍 행장이 외자를 끌어들인 것이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축하합니다. 이런 때에 참… 대단하십니다.”

 지금 생각해도 신통하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의 한국 담당자들이 전화를 걸어 “정말이냐”고 거듭 확인할 정도였다. 아마 홍 행장의 화려한 외교술이 빛을 발했을 것이다. 굉장한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코메르츠가 감자(減資·자본금을 줄임)를 걱정합니다. 위원장님이 블레싱(blessing·승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시 공적자금 투입의 전제조건은 감자 아니면 합병이었다. 외환은행이 부실해지면 정부가 공적자금을 넣게 되는데, 그때 감자를 할까 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애써 집어넣은 돈이 휴지조각이 될 수 있으니 그럴 만했다.

 “감자를 안 한다고만 약속하면 됩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게 어딘가. 솔직히 감지덕지였다. 당시 한국에 돈을 넣겠다는 외국 기업들은 예외 없이 정부에 손실 보전을 요구했다.

 “그 정도면 들어드려야지요. 걱정 말라고 하십시오.”

 이미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에게도 구두로 약속을 받아온 홍 행장이다. 그는 환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자랑스러웠겠는가.

 코메르츠 투자가 확정되자 정부와 언론도 흥분했다. 박수 치며 반겼다. “가뭄에 단비” “금융권 외자 유치의 물꼬가 트였다” 등 찬사가 쏟아졌다. 나 역시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6월 초 공식 석상에서 “외환은행은 선도 은행의 고지를 선점한 셈”이라고 치켜세웠다. 다른 은행의 외자 유치를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자인하고 싶지 않지만 이게 실수였다. 정부의 판단 착오였다. 외환은행의 부실이 그렇게 심각할 줄, 그래서 결국 감자까지 해야 할 상황이 오리라곤 짐작도 못했다. 외환은행은 당시 국내 외환거래의 90% 이상을 맡고 있었다. 환거래를 위해 계약을 체결해 놓은 코레스(Corres·correspondent arrangement)망도 세계적이었다. 기업 금융에 강했고, 인력 수준도 뛰어났다. 그만큼 외화 조달 능력도 뛰어났다. 그런데….

 상황을 제대로 알 게 된 건 한 달 뒤인 6월 말, 은행 경영평가 뚜껑을 열고 나서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외환은행의 부실 여신은 10조7923억원. 한 달 이상 연체돼 떼일 우려가 큰 돈이 그만큼이다. 평가를 받은 12개 은행 평균(3조6470억원)의 세 배, 외환은행 전체 여신의 28.6%나 됐다. 요즘 은행의 연체율이 1% 미만인 것과 비교하면 말이 안 되는 수치였다. 하기야 그럴 만했다. 기업 금융을 많이 했던 게 원인이었다. 당시 국내 기업의 주거래은행은 제일은행과 외환은행에 집중돼 있었다. 외환위기로 기업이 흔들리자 두 은행도 덩달아 부실이 커진 것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외환은행 처리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했다. 우선 퇴출 은행 중 한 곳을 외환은행에 인수시키려던 계획을 접었다. 다른 은행을 떠맡기는커녕 외환은행 혼자 살아남기에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 바람에 졸지에 하나은행이 충청은행을 맡게 됐다. 그렇다고 코메르츠와의 합작까지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가뭄에 단비”라며 좋아하던 시장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는가.

 돌아보면 외환은행의 첫 단추는 잘못 끼워진 것이었다. 약으로 생각했던 외자 유치가 사실은 독이 됐다. 그게 없었다면 정부는 98년 6월 말 경영평가 직후 외환은행에 뭔가 대책을 세웠을 것이다. 원칙대로 다른 은행과 합병시키든지 공적자금을 투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못했다. 다 외자 유치란 명분과 허울에 홀려서다. 그렇게 머뭇거리는 동안 외환은행은 독자 생존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오호근은 그때 “외자 유치는 환상”이라고 내게 싸늘하게 말하곤 했다(국제금융 전문가인 그는 당시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런 때 한국에 투자할 자본은 벌처 펀드(vulture fund)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벌처 펀드. 시체를 뜯어먹고 사는 독수리(vulture)처럼 부실 기업만 노리는 자본을 가리키는 단어다. 그런 시절 “한국을 믿는다”며 돈을 넣은 코메르츠다. 정부인들 어찌 외면하랴. 그러나 그런 감상이 결국 코메르츠는 물론 외환은행에도 화를 부르고 만 셈이다.

등장인물

▶홍세표(77) 전 외환은행장

1958년 한국은행에 입행. 67년 외환은행으로 옮겼다. 93년부터 4년여간 한미은행장을 맡고 97년 7월 외환은행장에 취임한다. 98년 5월 외환위기 한복판에서 독일 코메르츠은행으로부터 2억5000만 달러의 외자를 유치했다. 하지만 은행을 정상화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99년 2월 물러난다. 고(故) 육영수 여사의 언니인 육인순씨의 장남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처조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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