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대통령의 무거운 책임, 가벼운 존재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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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호 02면

이명박 대통령이 중동 3개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 김효재 청와대 정무수석의 사표를 11일 수리했다. 2008년 옛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전당대회 당시 돈봉투 살포 의혹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돈봉투 의혹이 불거진 지 36일이 지난 뒤다. 너무 실기했다. 이미 사퇴한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 수석에 대한 사법처리가 이뤄질 경우 이명박 정부는 커다란 도덕적 상처를 입을 것이다.

돈 봉투 사건 당시 김 수석은 정무수석이 아닌 국회의원 신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청와대의 책임이 덜해지는 건 아니다. 곧바로 진상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서 진실을 밝혔어야 했다. 묵인하고 묵살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여론이 가라앉기만을 바랐다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따지고 보면 선관위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 사건,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사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측근 비리 사건 등 민심을 뒤흔든 모든 사건이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이른바 친(親)이명박계가 관련돼 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스스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입을 다물고, 수수방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국민들이 더 화가 나는 이유다.

임기 마지막 해, 이른바 레임덕에 대한 이 대통령의 시각도 우려된다. 이 대통령은 그동안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며 “임기 끝까지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해 왔다. 이런 생각은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비리는 계속 터지는데 끝까지 열심히 하자는 자기암시만 한들 뭐가 해결되는가. 국민들은 이 대통령에게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모른 척하거나 ‘남 탓’으로 일관하고 있진 않은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했지만 모두 5년차 레임덕에 빠져들었다. 5년 단임제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국정을 운영하는 정치 행위는 기업을 경영하는 것과 전적으로 다르다. 3선을 노리는 푸틴 총리가 러시아 경제의 호황에도 불구하고 ‘현대판 차르’라는 비판을 받는 걸 보면 정치 리더와 국민 사이에는 영원한 긴장관계가 존재한다. 4년 중임제의 역대 미국 대통령들도 레임덕의 고통을 피해가지 못했다. 이 대통령에게는 앞으로 1년 남짓의 시간이 남아 있다. 짧지만 긴 시간이다.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는 누구 뭐래도 대통령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한다.

청와대는 요즘 야당 연합세력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주장에 침묵하고 있다. 무기력하게 끌려만 가고 있다. 미래 국익과 관련된 이런 문제에 대해 국민에게 호소하고, 최선을 다해 막으려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부패에는 단호하게, 국익에는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 FTA 문제에까지 팔짱을 낀다면 이명박 정부엔 남는 게 없다. 이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 국정철학을 분명히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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