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전쟁 아니면 조약 파기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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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민주통합당이 ‘집권하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겠다’는 서한을 버락 오바마 대통령 등 미국 지도부에 보낸 데 대해 전·현직 외교관들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우방이나 동맹국 사이에 체결한 협정을 폐기하겠다고 일방 통보하는 것은 외교관계에선 ‘전쟁을 하자’는 뜻이나 마찬가지인 적대행위라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공관에서 주로 근무한 한 전직 대사는 9일 “설사 실제 폐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대국 주재 대사관을 방문해 그 나라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는 것 자체가 적대감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외교부 조약 담당 관계자도 “국제사회에서 주요 조약의 파기는 국가가 식민 상태에서 독립했을 때 그 이전에 맺은 불평등 조약을 파기하거나, 쿠데타나 혁명으로 전혀 다른 성격의 정권이 탄생했을 때, 두 나라가 전쟁 직전의 적대적 관계로 발전했을 때 외엔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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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의 조약을 먼저 파기한 적이나 상대국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파기를 통보한 사례는 없다. 국제적으로 협정이 깨진 대표 사례로는 94년 미국이 클린턴 행정부 시절 북한과 체결한 제네바 합의가 있다.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영변 핵시설 동결을 대가로 미국 등이 경수로 2기를 지어주고 중유를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미국이 부시 정권으로 바뀐 2002년 10월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통한 핵 개발을 시도하다 발각됐고, 미국이 대북 중유 공급을 중단하면서 제네바 합의는 파기됐다.

 또 2000년 2월 이스라엘은 4년 전 레바논과 맺은 휴전협정 파기를 선언했다. 레바논에 근거를 둔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병사를 공격한 뒤 보복공습을 하면서다. 98년 영국은 유고슬라비아에 항공협정 파기를 선언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유고 간 긴장이 격화될 때다.

 이에 비해 한·미 FTA 협정문의 ‘폐기’ 조항은 상대국이 협정상 중대한 위반을 할 경우에 대비한 내용이라는 게 외교관들의 견해다. 외교부 조약국 관계자는 “상당수 협정·조약에 폐기권은 포함돼 있다”며 “절차를 보장해놓은 것과 실제 발효도 되기 전 정치적으로 파기를 선언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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