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의료쇼핑이라는 이름의 모럴 해저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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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성식
선임기자

건강보험공단 인천지사 홍기자 과장은 얼마 전 38세 불면증 여성 환자 K씨의 집을 방문했다. K씨가 2010년 병원 17군데를 200번 넘게 갔고, 약을 2660일치 처방받은 걸로 나와 의료 이용 행태를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다.

홍 과장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잠이 잘 안 오면 운동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하는 게 어떠냐. 이렇게 병원을 많이 가고 약을 많이 드시는 게 건강에도 좋지 않다”고. 건강관리 안내 책자도 함께 건넸다. K씨는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아무리 병원이지만 지나치게 많이 가는 게 환자에게 좋을 리가 없다. K씨는 언뜻 보기에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언니가 “제발 병원에 못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약에 취해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어서다.

 몸이 아픈 데가 아무리 많아도 1년 내내 이틀에 한 번꼴(연간 150일 이상)로 병원 갈 일이 있을까. 언뜻 생각하면 이해가 잘 안 된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17만 명에 달하고 주 2회(연간 100일) 이상 가는 사람은 52만 명이나 된다.

 지방의 한 외과의원에는 거의 매일 오는 노인 환자들이 있다. 퇴행성관절염·요통 환자가 대부분이다. 낮에 와서는 물리치료를 받고 병원에서 쉬다가 오후에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하고 내는 돈은 1500원이다. 이 돈(1500원)으로 온종일 시간을 보낼 곳이 병원만 한 데가 없다. 병원이 사랑방이 됐다. 게다가 전문의와 물리치료사의 서비스까지 받는다. 그 병원의 L원장은 “이렇게라도 환자를 받지 않으면 병원 문을 닫아야 하는 데가 많다”고 말했다.

 병원을 돌며 진료를 받는 의료쇼핑 환자는 정부 통계(52만 명)보다 훨씬 많다. L원장은 5일 물리치료를 하고도 3일치만 건보공단에서 받는다고 한다. 다 청구하면 깎이기 때문이다. 기초수급자들인 의료급여환자는 자기 돈을 거의 안 낸다. 국민의 3%다. 지난해 상반기에만 기초수급자 17만 명이 350일치 병원·약국 비용을 썼다.

 의료쇼핑에 지원되는 돈은 연 2조~3조원으로 추정된다. 62만 명의 암환자가 한 해에 쓰는 돈과 맞먹는다.

 홍 과장 방문 후에도 K씨의 의료쇼핑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홍 과장이 할 수 있는 조치는 그녀를 설득하는 것밖에 없다.

 병원 문턱이 너무 낮다. 게다가 환자를 자주 오게 할수록, 의료행위를 많이 할수록 병원 수입이 올라간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건강보험을 부러워했다는데 이런 점은 몰랐을 것이다. 환자·의사·병원·정부가 의료쇼핑이라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의 공범이다.

신성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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