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그는 어릴적부터 남달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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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천재적인 너무나 천재적인.'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원로 미술평론가 이경성씨의 백남준 평이다.

백남준의 천재성이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될만큼 이미 많은 미술사가들이 평론집을 통해 앞다퉈 얘기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모습이나 가족관계같은 사적인 영역을 드러낸 책은 거의 없어 그의 인간미를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기껏해야 서울의 내로라하는 부자집 아들이 도쿄대학을 나와 어찌어찌해서 비디오아트의 창시자가 되었고, '예술은 사기' 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벌리는 기인(奇人)이라는 정도가 일반독자가 알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다.

백남준의 애국유치원 친구인 수필가 이경희씨가 쓴 〈백남준 이야기〉가 숱한 백남준 관련 책 가운데서도 특히 돋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예술가의 경우가 다 그렇듯 백남준 역시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는 그가 어떤 배경을 가진 어떤 인간인지 아는 것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 단서, 즉 백남준의 남다른 유년기와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담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지금까지 여백으로 남겨진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백남준과 저자는 유치원부터 알아왔지만 사실 평생지기는 아니다.

'서로 말없이 좋아했던 왕자와 공주 사이' 였던 그들이 유치원 졸업(1939년)이후 다시 만난 건 1984년의 일. 남들같으면 서로의 이름도 가물가물할만큼의 긴 공백이지만 백남준은 35년만에 처음으로 귀국하자마자 "유치원 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 고 말했다.

그만큼 그들의 유년은 짧지만 특별한 기억으로 가득차 있었다.

저자가 회고하는 '왕자와 공주' 는 당시 서울에 두대 밖에 없는 캐딜락 중의 하나인 백씨네 캐딜락을 타고 유치원에 다녔다.

유치원을 파하고서도 '말없는 상고머리' 와 '남준이 색시' 는 고단샤 그림책이 많은 백남준 집에서 늘상 놀았다.

그때 백남준은 흙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줄을 긋고 뭔가를 그렸다. 저자가 지금 생각해보니 작곡을 하는 것이었다.

또 한번은 큰누나가 털실 바지를 하나 짜주었는데 어느날 백남준이 무릎께를 가위로 잘라버렸다.

어떻게 되나 보려고 했다나. 아주 단편적인 일화들이지만 어쨌든 백남준이 보통은 아닌 별난 아이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책에는 어린 시절 얘기만 있는 건 아니다. 저자는 84년 이후 백남준과 관련한 전시와 퍼포먼스를 찾아다녔는데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인 부인 시게코가 백남준의 피아노 부수는 퍼포먼스에 넌더리치는 대목은 유쾌하다.

시게코는 "피아노 솜씨가 멋진데 하도 피아노를 부숴서 문제" 라고 퍼포먼스 도중 저자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특히 피아노를 전공해 피아노를 하느님 모시듯 위하는 장모는 그의 퍼포먼스에 기겁을 했단다.

또 뇌졸중 이후 불편한 몸에도 '소생(小生)몸은 착착(着着)회복(回復)중(中)' 이라는 팩스를 넣어 자신을 걱정할 주변을 챙겼다는 인간적인 에피소드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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