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가 달라졌다] 下. 새 소비 주체 떠오른 아이들

중앙일보

입력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한국소비자보호원. 1층 현관 옆의 소비자상담창구에서 갑자기 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운동화 품질에 이상이 있는 이상 운동화 값을 돌려주고 이 때문에 당한 정신적.육체적인 피해까지 보상해 줘야 하지 않겠어요."

여고 1년생인 김수진(가명)양의 당당한 요구다. 지난달 청담동 수입매장에서 구입한 운동화가 세탁후에 색깔이 변하자 곧장 소보원에 달려간 것.

지난 3일 분당 신도시 야탑동에 있는 이민화(39)주부네 집. 엄마.아빠.아들.딸 네명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다.

새로 살 승용차 모델을 정하는 중인데 중형차를 원했던 부부가 RV카의 장점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설득하는 두 아이들에게 밀려 결국 RV카로 결정했다. 아이들이 소비 조언자로서 적극 나서고 있는 대목이다.

소비주권이 아이들에게로 이동하고 있다.

가장인 남편의 소비주권은 주부인 아내에게로 옮겨간 지 오래지만 이를 넘 겨받은 주부들도 컴퓨터 등으로 무장한 신세대 자녀들에게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이가 어리다고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구입한 상품에 불만이 있으면 당당하게 피해구제를 요구하기도 한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에 올들어 8월 말까지 접수된 10대들의 불만은 모두 1천6백54건으로 지난 한해 동안의 실적(9백47건)의 두배에 육박하고 있다.

소비자정보센터 안현숙 과장은 "특히 올들어 10대들의 소비자 불만이 급속히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며 "불만내용도 상품의 하자수리나 교환에 그치지 않고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등 당당한 소비자로서 어른들 못지 않다" 고 전했다.

가계지출에서도 아이들의 몫이 만만치 않다.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에 사는 주부 박영순(35)씨의 경우 한달에 초등학교 4학년.2학년인 두 아이에게 매달 고정적으로 83만1천원을 지출한다.

피아노학원비.영어과외비.학습지 등 사교육비가 대부분이지만 여기에 간식비와 옷값 등을 합치면 1백만원이 훌쩍 넘어간다.

박씨 부부가 한달에 함께 쓰는 비용(남편 용돈 50만원을 포함해 80여만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박씨는 "한달 평균 소득의 3분의 1 정도가 아이들에게 드는 셈" 이라며 "주변에서 아이들이 쓸 돈을 보충하기 위해 취업전선으로 나서는 주부들도 많다" 고 말했다.

아이들이 소비의 주체로 떠오르자 기업체들도 이들을 겨냥한 마케팅에 온 힘을 쏟고 있다. 할인점 월마트의 경우 아예 어린 고객들을 위해 크기가 작은 쇼핑카트를 따로 준비해놓고 있다.

신세계 이마트의 여성화장실에는 남아용 소변기가 마련돼 있다. 부모가 원치 않더라도 아이들이 쇼핑하기 편한 곳을 골라 부모를 데리고 올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마트의 경우 지난 97년 총매출의 15%에 불과했던 유아와 아동 관련상품의 판매금액이 지난해 19%로 늘었고, 올들어서는 25%를 차지할 만큼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아이들을 겨냥한 마케팅은 TV광고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광고모델로 한동안 주가를 올리던 최불암.김혜자 등이 한발짝 물러서고, 핑클.태사자.샤크라 같은 젊은 신인 연예인과 피카추.텔레토비 등의 캐릭터가 전면으로 나서고 있다.

제일기획 제작기획팀 김의석(44)국장은 "요즘 대부분의 광고주들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어린 연예인을 원한다" 며 "이는 구매력을 가진 층이 부모에서 자녀들로 옮겨가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소보원 소비생활연구팀 송순영 책임연구원은 "아이들 시장이 팽창하는 돌이킬 수 없는 추세에 맞춰 이들이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기성세대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 이라고 지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