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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정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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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스티브 잡스는 비록 지난해 사망했지만 올해 대한민국은 그의 해가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이제 한국 정치에도 네트워크 정치의 패러다임이 초보적으로나마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아이패드 등을 통해 기존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며 수직적인 패러다임을 넘어 개방·공유·협업의 시대를 열었다. 이번 민주통합당 전당대회는 여의도 정당이나 지역 정당이 아니라 전국 지지자 네트워크에로의 개방을 통해 ‘스티브 잡스 모델’에 한 발 더 다가갔다.

 물론 민주당은 지난 2002년 예비경선을 통해 개방적 모델로의 실험을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일회적 실험은 여전히 정당과 외부 네트워크의 경계가 고정적이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등을 통한 전통적 미디어 엘리트가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면서 돈이 많이 드는 ‘청중 민주주의’ 단계에 불과했다. 반면에 이번 실험은 정당과 외부의 굳은 경계를 유동화시켜 정당이 일상적으로 시민의 온/오프 숲 속에 뿌리내리기 위한 역사적 시도다. 무엇보다 미디어 엘리트들이 아니라 수평적 네트워크의 시민들이 다양한 책임과 기부를 동원하는 네트워크 정치 시대로 한 발 진전했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

 여기서 ‘겨우 한 발 진전’이라는 평가는 민주통합당 관계자들에게 혹시 서운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네트워크 정치의 진정한 잠재력은 단지 개방이 아니라 공유와 협업에 있다. 필자는 2002년에 ‘리눅스의 정치’(개방적 네트워크에서의 집단지성 혁신) 패러다임을 제시한 이후 슈퍼스타K 방식의 경선, 온/오프 융합의 21세기 타운홀 미팅 등 다양한 혁신을 여야에 요구해 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외부의 시민 온/오프 네트워크와 공유·협업을 통해 더 진화된 정치를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제 한국의 정당들은 올해를 대대적인 혁신과 경쟁의 해로 삼아야 한다. 그 핵심은 소수 활동가 정당이나 청중 민주주의 시대를 넘어 네트워크 정치 시대를 둘러싼 혁신의 경쟁이다. 갤럭시탭과 아이패드가 혁신 경쟁을 하듯이 박근혜와 한명숙 대표는 이제 본격적 경쟁의 시험대에 올랐다. 총선 공천, 정책 어젠다, 대선 경선에서 누가 더 스티브 잡스의 매력적 혁신에 다가가는지가 승부의 결정적 분기점이 될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일각의 좌파 지식인들이 생각하듯이 네트워크 정치의 시대는 곧 직접민주주의나 비전문가만의 시대가 열린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시민들의 의사를 해석하고 적절히 대표하는 대의제와 시민이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는 열린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 융합되어야 한다. 미시적 분야의 정책 전문가와 폭넓은 집단지성의 지혜는 복합적 네트워크 속에 서로 수렴되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이 두 가지를 멋지게 융합한 중용의 대가다. 향후 10년은 이 균형을 이루어내는 정치인들이 한국 정치를 지배할 것이다. 스티브 잡스식 개방·공유·협업의 정치와 경제를 누가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려 있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