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일곱번째 편지〈태풍 속에 앉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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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 가다가
쓰러져 죽더라도
싸리꽃 벌판 -소라

당신은 지금 어디쯤에 있습니까? 며칠 새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바람의 냄새를 맡지 못하니 속이 울렁거립니다.

폭풍이 몰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하이쿠를 읽습니다. 옷장 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처럼 주위가 어둡고 공기가 축축합니다. 여름이 다 가고 있는데 이 비바람은 웬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텔레비전 화면 가득 들녘에 쓰러져 있는 한해의 곡식들이 안타깝습니다. 비바람을 피해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모퉁이 가게 처마에 가방을 들고 서 있습니다.

힘겹게 옷장문을 열고 나가 주차장으로 내려갑니다. 내 소유의 자동차를 갖게 된 건 불과 이 년 전의 일인데 이놈은 날이 흐려지면 어김없이 짐승처럼 변합니다. 바닥에 낮게 엎드린 채 눈을 부라리고 곧 밖으로 뛰쳐나갈 듯이 으르릉거립니다. 굶주림을 참지 못한 짐승처럼 말입니다.

어느날 비가 내리는 밤에 나는 이런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지하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에 부르릉 시동이 걸려 있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불쑥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우산을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갔습니다. 몽유병 환자처럼 말입니다.

그 소리는 내가 주차창으로 내려갈 때까지 줄곧 들려오고 있었는데 슬그머니 무서워지더군요. 누가 차를 훔쳐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차에 시동이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음습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가 있는 곳에 다가가 보니 놈은 시침을 뚝 떼고 조용히 엎드려 있었습니다. 한동안 그 앞에 서 있다 도로 집으로 올라가려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이대로 올라가면 틀림없이 또 빈 차에 시동이 걸릴 것만 같았습니다. 새벽 3시쯤이었습니다.

나는 트렁크에 우산을 집어넣고 차 안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차 안에 가두어져 있던 공기 속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습니다. 주술처럼 희미하게 속삭여오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요. 그러자 과연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배 고파. 비가 오면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프다구."
"......"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 줘. 어디든 가고 싶어."

그 소리는 너무도 생생해서 마치 현실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습니다. 뒤미처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 밤에 어디로 가지?"

곧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어디든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오래 전에 읽은 최돈선이란 시인의 〈샘밭〉이란 시가 뇌리에 떠올랐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지요.

샘밭에 비 내린다.
어디든 가고 싶구나.

샘밭은 춘천 소양강댐 아래 있는 마을입니다. 배추를 많이 키우는 곳이죠. 또 최돈선 시인이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 길로 차를 몰고 빗길을 달려 춘천까지 갔습니다. 배추밭에 내리는 비를 보기 위해 말입니다.

모든 물건은 그걸 소유하고 있는 주인을 닮아가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차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새로 산 차를 일 년 정도 몰다 보면 어느 새 주인의 성격과 똑같아집니다. 사람과 달리 보다 직접성을 띠고 일방적으로 길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남의 차를 운전해보면 금방 내 차와 다름을 느낍니다. 가령 늘 정속 운행을 하던 차는 속도가 나지 않습니다. 그게 아무리 좋은 차라도 말입니다. 과속으로 달려본 적이 없으므로 순발력이 떨어지고 엔진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은 내 차라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주차장에 처박아 놓았다 꺼내서 달려보면 금방 헉헉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아닌 말로 가끔 '밟아줘야' 합니다. 내 경우 조금 속도를 즐기는 편이어서 차를 사고는 이삼 일에 한번씩 시속 170-180km를 밟아주면서 길을 들였습니다. 밤이면 아무 때나 끌고 나가 기어이 과속 복종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니 주인을 닮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날 밤 지하 주차장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다름아닌 내 안에서 들려오던 소리였습니다.

비가 오면 김치전에 동동주를 마시고 잠을 자든지 아니면 어디든 밖으로 나가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우두커니 방 안에 앉아 있으면 여지없이 옷장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듭니다.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봐도 역시 기분은 한결같이 축축합니다. 따라서 곧 우울해집니다. 바다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물처럼 흘러다녀야 합니다.

얼마 전 비가 내리던 밤 동대문에 간 적이 있습니다. 새벽이었습니다. 멀리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야간에 날궂이를 한 것입니다. 그날 새벽 동대문 두산타워에 가서 쇼핑을 했던 일이 아직도 재미있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특히 지하 1층에 가니 온갖 유명한 소품들을 모아놓은 가게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술과 그릇과 과자와 재떨이와 시계 등등 그야말로 없는 게 없었습니다. 새벽이었는데 사람들로 꽤 많았고 여행온 일본인들도 있었습니다. 또 이층 삼층으로 올라가니 온갖 액세서리와 신발과 옷들이 그 어느 백화점보다도 다양하게 진열돼 있었습니다. 거기서 몇 가지 물건을 사들고 다시 빗길을 달려 새벽 4시쯤에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비가 내리는 날은 견디기가 힘듭니다.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아닌 말로 술이라도 마셔야 합니다. 집에 갇혀 있으면 남들이 사는 세상에서 멀리 추방된 느낌이 듭니다.

태풍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 먼 데로 여행을 간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강원도 어디라고 합니다. 낯모르는 여인과 소주를 마시고 있다고 합니다. 제기랄. 왜 전화를 걸어 염장을 질러놓는 것일까. 핸드폰 끄고 둘이서 조용히 술이나 마실 것이지.

슬슬 날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 어디로든 가봐야겠습니다. 태풍 속에 앉아 읽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습니다.

여행 길에 병드니
황량한 들녘 저편을
꿈은 헤매는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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