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윤제 칼럼

지식사회와 생활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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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지난 4세기 동안 서구가 세계사를 주도해 온 근원적 힘은 군사력도, 경제력도 아닌 지식의 힘이었다. 16~17세기 베이컨·뉴턴·데카르트 등으로부터 시작된 과학혁명과 홉스·로크·흄·칸트·벤담·밀 등으로 이어져 온 철학사상이 결국 유럽에서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합리적 사회제도와 효율적 시장을 정착하게 했다. 오늘날 가령 영국과 같은 나라는 군사력과 제조업에서 이미 힘이 크게 기울었지만 여전히 지식의 힘에 의해 세계금융과 법률, 자문용역 서비스를 주도하고 있다. 아시아에 밀려 경제력이 쇠퇴하고 있음에도 지식에 바탕을 둔 소프트파워가 여전히 서구로 하여금 오늘날 국제기구 운영, 세계안보 및 환경, 무역, 통화금융 질서를 주도하게 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이 2011년 발간한 ‘아시아 2050’이란 보고서는 2050년 아시아가 전 세계총생산의 52%를 차지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약 300년 만에 다시 아시아가 세계총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세계경제의 중심적 지위를 되찾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아시아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27%인 것에 비춰 보면 향후 40년간 아시아는 엄청난 도약을 통해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아시아 50개국 중에서도 이러한 도약을 견인할 나라로 7개국을 꼽고 있는데 중국·인도·인도네시아·일본·한국·태국·말레이시아가 포함돼 있다. 이들 7개국이 2050년 아시아총생산의 90%, 전 세계총생산의 45%를 차지하고 향후 40년간 아시아 경제성장의 87%, 전 세계 경제성장의 55%를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현재 아시아의 선진국, 특히 한국과 일본이 이러한 아시아의 도약을 이끄는 과학과 기술혁신, 나아가 성장을 넘어 광범위한 복지사회 건설을 선도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과연 이 보고서가 기대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변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우선 우리 사회의 모임문화와 음주문화부터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지식사회로의 발전은 읽고 사색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을 사회가 제공하고 또한 지식과 실력이 개인의 성공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때 가능해진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몰려다니는 문화는 바로 실력과 지식보다 연줄이 더 힘을 발휘하는 사회라는 것을 말해 준다. 교통체증이 극심한 도시에서 수많은 경조사에 일일이 눈도장을 찍어야 하고 동창회·친목회 등에 얼굴을 내밀며 연줄을 쌓고 유지해야 하는 우리 사회는 지식을 쌓고 발전시켜 나가기에 너무 바쁜 사회다. 한국 남성의 일인당 알코올 소비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다음 날 술 냄새를 풍기며 출근하는 것이 예사로 받아들여지는 우리의 근로생산성은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지식계층에서부터 이러한 문화를 바꿔 나가려는 시도가 크게 일어나야 한다. 대학교수의 업적 평가와 연구기관, 중앙정부 및 각종 전문 직종에서의 직무 분석, 성과 평가 및 승진 기준이 지금보다 훨씬 엄격해지는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고등교육의 질도 높아져야 한다. 반값 등록금보다 더 시급한 것은 대학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대학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일반기업의 직장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술 실력이 유능한 간부의 잣대가 돼서는 지식사회가 될 수 없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이공계 분야에서는 이런 변화가 빠르게 일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부 기술력에서 세계 최고들과 경쟁하기 위해 불가피한 변화였을 것이다. 인문사회 분야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빨리 확산됐으면 한다.

 폴 크루그먼 교수는 1994년 발표한 그의 논문에서 아시아의 경제성장은 영감(inspiration)에 의한 게 아니라 땀(perspiration)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저축과 노동 투입 증가가 끝없이 지속될 수는 없으므로 아시아 국가들은 과거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가 그랬듯이 곧 성장의 한계를 맞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이 논문은 아시아 경제위기 직후 많은 공감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아시아로 향후 세계경제의 중심이 이동할 것이란 걸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향후 아시아는, 그리고 한국은 세계경제 질서를 주도해 나갈 만한 지식의 힘을 갖추게 될 것인가?

 오늘 우리는 기존 질서에 대한 실망과 가치의 혼돈이 어지럽게 뒤엉켰던 한 해의 끝자락에 섰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질서에 대한 모색이 깊이 있게 진행되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생활문화의 변화와 함께 시작되길 소망해 본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