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 속 4m 파도 뚫고, 3명은 살아왔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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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전 3시20분쯤 해경이 울산 간절곶 앞바다에서 침몰한 건아호의 조기장 김영근씨를 구조하고 있다. 이날 새벽 선박 침몰로 14명의 선원 중 3명이 구조됐으나 1명이 사망하고 10명은 실종 상태다. [울산해양경찰서 제공]

26일 오전 2시쯤 울산시 울주군 간절곶에서 동남쪽으로 24㎞ 떨어진 해상.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집어등을 켠 부산 선적 ‘739건아호(139t)’가 2~4m의 높은 파도에 출렁이며 오징어잡이에 한창이었다. 선원들이 묵직한 그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순간 큰 파도가 갑자기 배를 덮쳤다. 순식간에 기관실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고 무게 중심을 잃은 배는 그대로 침몰했다. 이 사고로 선원 권모(53)씨는 숨진 채 발견됐고 선장 신철(61)씨 등 10명이 실종됐다. 그러나 기관장 황수석(48), 조기장 김영근(49), 항해사 김종인(46)씨 등 3명은 구조됐다. 황 기관장이 침몰 직전 쏜 조명탄을 보고 인근 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다른 어선과 해경이 즉각 구조활동에 나선 것도 구조된 3명의 생환을 도왔다. 황 기관장은 “선실에서 자다 고함소리에 나와 보니 배가 반쯤 기울어져 있었다. 나도 조명탄을 쏜 뒤 침몰 직전 배에서 뛰어내렸다”고 사고 순간을 전했다.

 당시 해상에는 풍랑주의보가 발효돼 초속 12~16m의 강한 바람이 불었다. 파도도 3m 이상 높게 일었다. 문제는 추위였다. 당시 기온은 영하 1.4~1.7도, 수온은 영상 15.1도였다. 보통 어른이 수영복만 입고 바닷물 속에 있을 때 수온이 영상 21도에서는 3시간, 15도는 1시간30분, 10도는 30분 정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기관장 황씨와 항해사 김씨는 사고 한 시간 안에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다른 선박에 구조됐지만 조기장 김씨는 1시간22분이 지나 해경에 구조됐다. 사고 시간은 오전 2시 이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조기장 김씨가 조금만 늦게 구조됐다면 자칫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김씨는 “차가운 물속에서 체온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고 말했다. 김씨는 구조 직후 제대로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해경에게 “아직 물속에 남은 사람이 있을 건데…”라며 동료 걱정을 앞세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고 1시간40여 분 뒤 선원 권모(53)씨는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됐다. 나머지 10명의 동료들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해경의 구조와 수색도 쉽지 않았다. 평소 해경 경비함으로 간절곶에서 사고해역까지 30~40분이면 도착하지만 이날은 날씨가 나빠 1시간 정도 걸렸다. 해경 관계자는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파도도 거세 구조와 수색 작업에 애를 먹었다”고 전했다. 사고해역에는 지난 24일부터 이날까지 풍랑주의보가 발령 중이다. 15t 미만의 선박 출항은 금지되지만 건아호는 139t이어서 제한을 받지 않았다.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실종자 가족들의 집은 눈물바다가 됐다. 선장 신철씨의 부인은 “남편이 어제 ‘잘 갔다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아직 휴대전화 신호가 가는데 왜 전화를 안 받느냐”며 오열했다. 선원 박춘호(52)씨의 누나는 “부모 잃고 내가 키운 동생인데 가슴이 찢어진다. 당장 구조선을 보내 동생을 살려 달라”며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부산 서구에 있는 선사 건아수산은 전 직원이 비상 소집돼 사고 대책을 논의 중이다. 사고현장에는 해군과 해경의 함정 및 단정 10척, 어업지도선 및 어선 17척, 항공기 5대가 수색을 벌이고 있다.

울산=위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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