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서서히 부는 한국 바람

중앙일보

입력

지난주 일본에 다녀왔다. 대형 레코드 숍을 장식하고 있는 많은 앨범 중 눈에 띄는 한 장의 음반이 있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테크노 그룹 덴키 그루브(電氣 Groove)의 새 앨범으로 앨범 타이틀에 '일본 2000' 이란 문구가 한글로 크게 써 있었다.

사실 덴키 그루브는 한국과 꽤 인연이 깊은 편이다. 오래전 뽕짝 가수 이박사의 테크노 리믹스를 도와주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으며, 지난 앨범에선 옛 가요 '이별의 부산 정거장' 을 샘플링 한 적도 있다.

덴키 그루브 처럼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는 뮤지션이 아니더라도 대다수 일본 아티스트들은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해외시장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는 피치카토 화이브.커넬리우스 등과 인디 그룹 DMBQ의 앨범에서도 한글이 노골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전설적인 그룹 YMO의 'Seoul Music' 도 다시금 회자하고 있다.

또한 지난달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에 출연했던 샴 셰이드(Siam Shade)의 한국공연은 음악잡지는 물론 시사.만화잡지에까지 소개될 정도로 화제를 뿌렸다.

일본 대중음악의 갑작스런 한국 관심을 어떻게 풀이해야 좋을까?

첫째, 일본 대중음악의 한국 개방이 현실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일본에 이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한국 음반시장을 더 이상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대형 음반사를 중심으로 점점 확산되고 있다.

둘째는 세계 2위의 음반시장이라는 일본에 비해 턱 없이 뒤진 음악 후진국이라는 고정 관념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의 대중음악은 무분별한 표절과 지나친 심의로 인상이 좋지 않았으나, 인터넷과 위성방송 등이 확산되면서 그 발전상이 직.간접적으로 소개될 수 있었다.

셋째, 뮤지션들의 음악적인 교류다. 그간 일본의 많은 뮤지션들의 생각은 미국이나 영국 뮤지션들과 어떻게든 교류를 맺어야 겠다는 생각이 짙었다.

표면상으로는 교류라 얘기하겠지만, 누가 봐도 그것은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의 일본 경제력을 감안한 일방적인 원조 형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비싼돈 건내주며 해외 뮤지션의 이름을 얻어오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교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비슷한 문화권 내에 있는 국가들끼리 보다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함께 해외시장 진출의 방법을 모색하자는 개런티 교환 공연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일본의 많은 음반사나 인터넷 회사들이 국내에 찾아오는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다.

일본에 비해 월등히 앞선 MP3로 대표되는 디지털 음원과 인터넷 회사들의 수익 모델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후지 록 페스티벌에 크라잉 넛이, 콘텍트 2000에 J.지누션.허니 패밀리가 출연한데 이어 델리 스파이스.자우림 등이 크고 작은 일본 공연에 참여할 예정이다.

참으로 고무적인 현상이다. 일본에 뒤지지 않는 대중음악의 요소들을 개발하고 실력있는 뮤지션을 키워 나가는 것만이 일본 대중음악 개방을 능동적으로 이용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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