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ㆍ자연 사랑 온몸으로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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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제 모든 언어와 관념의 유희를 버리고 몸으로 이야기하자. 세치 혀로써가 아니라 온몸으로 우리 땅 우리 마을을 사랑하자. 쉰 두 살의 나이로 국토의 곳곳을 1년 여 동안 헤집고 다닌 시사저널 편집국장 김 훈 님이 〈자전거 여행〉(생각의 나무 펴냄)을 냈다.

한때 '신문 기자 중에 유일하게 자기 목소리를 실어내는'(고 김현 님의 표현) 문학 담당 기자로 독자들을 신명에 빠지게 했던 그가 쉰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 이번에는 '풍륜(風輪)'이라 이름한 자전거에 몸을 싣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오로지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그래서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 책 9쪽)임을 절감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떠났다.

★몸 앞의 길이 몸 안의 길로 흘러 들어왔다가 몸 뒤의 길로 빠져나갈 때, 바퀴를 굴려서 가는 사람은 몸이 곧 길임을 안다. 길은 저무는 산맥의 어둠 속으로 풀려서 사라지고 기진한 몸을 길 위에 누일 때, 몸은 억압 없고 적의 없는 순결한 몸이다.(이 책 17쪽)

99년 가을부터 올 여름까지 전국의 산천을 끌고다닌 1년이 그의 여정이었다. 허벅지의 근육에 배어나오는 땀으로 그가 넘은 태백산맥과 우리 산천의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이 책 8쪽)

새벽 여관 방에서 그는 "한 자루의 연필과 더불어,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의 절벽 앞에서 몸을 떨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 자루의 연필과 두 다리와 자전거의 두 바퀴가 빚어낸 한 편의 아름다운 교향시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흘러오고 흘러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 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은 낡은 시간의 몸이 아니고 생사가 명멸하는 현재의 몸이다. 이끄는 몸과 이끌리는 몸이 현재의 몸 속에서 합쳐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고, 가려는 몸과 가지 못하는 몸이 화해하는 저녁 무렵의 산 속 오르막길 위에서 자전거는 멈춘다.(이 책 16쪽)

자동차로서는 엄두도 내기 힘든 이름없는 고갯길. 그 길은 숯불에 갈비 구워먹는 '가든'도 낮이고 밤이고 러브하는 '파크'도 우주선 발사기지의 축소모형처럼 생긴 이동통신회사의 기지국 안테나도 없는 곳이다. "속세의 길을 저어가는 자전거는 이 누린내 나는 인간의 풍경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피해갈 뿐"이라며 그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사람의 흔적을 찾는다.

자연에 대항해 백전백패하는 그의 온몸으로 쓰는 문장은 여수 돌산도의 향일암에서 시작한다. 자연에 대항해서 승리할 수 없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다리가 자전거의 페달을 밟아대는 동안 그의 눈은 선암사 뒷산에 피어난 산수유를 바라보고, 그의 생각은 산수유가 사라진 뒤 피어나는 목련의 자의식을 떠올린다.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을 오를 때, 길이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올 뿐 아니라 기어의 톱니까지도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내 몸이 나의 기어인 것이다. 오르막에서, 땀에 젖은 등판과 터질 듯한 심장과 허파는 바퀴와 길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땅에 들러붙어서 그것들은 함께 가거나, 함께 쓰러진다.(이 책 18쪽)

자연은 삶의 터전이기에 그에게 의미가 있고, 도시의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곧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한 복판에 온몸으로 기어들어가겠다는 심정이기에 그는 자전거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적어낸 글에서는 그가 생각하는 자연이 어떤 것인지 추측하게 한다.

남해와 서해를 거친 그는 이제 태백의 준령을 몸뚱아리 하나로 넘는다. 강원도 고성의 산불 지역을 넘으며 그는 타버린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새순을 발견하고, 숲은 결코 죽지 않으며 기어이 살아서 새 숲을 이룬다는 자연의 준엄한 이치를 확인한다.

★오르막길 체인의 끊어질 듯한 마디마디에서, 기어의 톱니에서, 뒷바퀴 구동축 베어링에서, 생의 신비는 반짝이면서 부서지고 새롭게 태어나서 흐르고 구른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이 책 19쪽)

눈덮인 태백산맥을 자전거로 넘은 그는 "산맥을 넘어가는 길은 골과 골을 휘돌아 흐르는 계곡물의 표정을 닮고, 큰 강의 하류를 따라 내려가는 길에는 점점 넓어지는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의 완만함"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한갓 언어유희로 쏟아내는 숱하게 많은 글의 향연 속에서 김훈 님의 글을 만나는 것은 글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자전거 여행이라는 온몸으로 자연 안에 깊숙이 묻혀들었던 자연과 가장 가까운 사람의 향내를 맡을 수 있어서다. 몸! 그것은 바로 쉰 두 살의 김훈 님이 지난 한햇 동안 공들여 땀으로 찍어낸 글 잔치의 알맹이였다.

1년에 걸친 김훈 님의 여행으로 그의 자전거 '풍륜'은 늙고 병든 말처럼 다 망가졌다고 한다. 망가진 자전거 위에 남긴 그의 아름다운 에세이집 〈자전거 여행〉에는 그러나 그 풍륜의 흔적이 살아 춤추고 있다. 국토의 곳곳에 새겨진 바퀴 자국을 그대로 들여다 보는 듯하다.

지난 7월에 그는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 값 월부를 갚으려 한다. 사람들아 책 좀 사 가라"고 그는 책 머리에 썼다. 그의 새 자전거는 이제 다시 또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 이제 온몸으로 국토를 사랑했던 중년 남자의 자전거 값 할부를 메워주기 위해서라도 책을 사야 할 모양이다. 여행에서 얻은 그의 사색의 편린들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사 보는 사람들에게 자전거 가게에서 주는 보너스 쯤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큰 선물이 될 것이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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