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만원 빚 □□중독 젊은 여성들 결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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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소재의 한 대학교수 박모(44·여)씨는 지난 3월 일주일 동안 옷·구두 등을 사는 데 3000만원을 썼다. 청담동 의상실에서 300만원짜리 모피코트를 사기도 했다. 박씨는 “라벨은커녕 포장조차 뜯지 않은 제품도 많았다”며 “자괴감에 우울증이 걸릴 지경이지만 입지 않을 걸 알면서도 쇼핑을 멈추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박씨는 입기 위해 옷을 사는 게 아니라 ‘구매 그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전형적인 ‘쇼핑 중독자’다. 쇼핑 중독에 빠져드는 한국 여성들이 늘고 있다. 국내 전문가들은 현재 성인 여성 10명 중 1명이 쇼핑 중독 성향인 것으로 추정한다. 행정안전부의 인터넷중독 실태조사에 따르면 "인터넷 쇼핑의 사용 조절이 안 된다”고 응답한 성인 여성은 전체의 13.5%였다. 지난 11월 영국컨설팅업체 RSM테넌은 영국 여성의 49.2%가 채무 불이행 상태고 이들의 대부분이 쇼핑 중독 때문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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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핑 중독으로 인한 빚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다. 지난 11일 서울 석촌동의 한 원룸에서 네일아티스트 A씨(33·여)가 쇼핑 중독으로 인한 빚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옷을 사느라 의상실에 3000여만원의 외상이 있었고 카드빚이 4000만원이었다. 남자친구가 A씨의 빚을 일부 갚고 “씀씀이를 줄여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극단적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3월 부산의 한 대형백화점 여직원(28)도 ‘빚을 갚지 못하고 떠나게 돼 미안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명품 가방·의류를 구매하느라 1억여원의 카드빚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2009년 개인 파산을 신청하고 개인회생 절차를 밟기도 했지만, 다시 쇼핑 중독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신의학계는 쇼핑 중독을 충동조절 장애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2006년 8월 영국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질환 진단·통계 편람’에 “쇼핑 중독은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분석하면서부터다. 자살에 이르는 우울증과 달리 쇼핑 중독은 그 자체가 자살 충동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한일장신대 김충렬 교수(심리치료대학원장)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중독에 빠져 빚을 내면서 쇼핑을 계속하다 채무의 압박을 받아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쇼핑 중독이 남성들의 도박·게임 중독처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문제를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주변인들도 정신적 문제라기보다 습관의 문제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경희대 백종우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쇼핑 중독으로 정신과를 찾는 사람은 전체 환자의 1%도 안 된다”며 “심각한 소비중독 성향은 병으로 생각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서울병원 강은호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쇼핑 중독은 치료를 받아야 하는 문제인데도 ‘정신 좀 차려라’는 식의 말만 해 죄책감을 키우게 하는 것이 중독 증상을 강화한다”고 말했다.

쇼핑 중독으로 인한 채무는 법적 구제도 받기 힘들다. 신용회복위원회 유재철 홍보팀장은 “쇼핑에 충동적으로 빠져들어 채무가 생길 경우 원칙적으로는 구제를 할 수 없다”며 “구제 대상에 대한 위원회의 가이드라인은 도덕적 해이가 있을 법한 사람은 거르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정봉·

조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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