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꿈틀거리는 삶이 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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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떼의 어릿광대들이 있다. 사탕에 미친 뚱보 펠릭스, 갈비뼈가 빨래판처럼 드러나는 꼬챙이 펠릭스, 절대 말을 하지 않는 트로이, 모두들 계집애라고 부르는 꼬마 플로리안, 이들의 '태양' 야노슈, 그리고 좌반신 마비로 왼쪽 발을 질질 끌고 다니는 베니.

이들 어릿광대들에게도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다. 항상 미친 짓에 미칠 것. 한밤중 여학생 기숙사의 비상 사다리에 기어오르는 미친 짓에도 미쳐야 하고 성 상담소에 가서 동성애를 하고 싶다는 거짓말에도 미쳐야 하고 기숙사에서 도망친 뒤 스트립 걸 팬티 속에 10달러를 집어넣는 미친 짓에도 미쳐야 한다. 그것도 환장할 정도로. "우리 모두는 미쳤어"라는 말에 허리를 꺾고 한바탕 웃으려면 그럴 수밖에.

82년생 벤야민 레버트가 16살 때 쓴 〈크레이지〉(조경수 옮김, 민음사)는 10대 소년들의 방황과 좌절, 그리고 희망을 다루고 있다. 벤야민은 화자인 베니처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신발끈도 맬 수 없을 정도로 왼손과 왼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그는 컥컥 질식할 듯 숨 막히는 자신의 삶을 화자인 베니의 눈과 입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비상 사다리'는 오를 수 있어도 '비상구'는 찾을 수 없는 10대의 암담한 삶. 김영하 님의 단편〈비상구〉(〈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 수록) 는 버림받은 10대의 삶을 욕이 나올 정도로 슬프게 그리고 있다. 자신이 음모를 밀어준 여자친구가 손님한테 개처럼 맞고 들어오자 '퍽치기'를 가장하여 그를 움씬 두들겨패는 주인공. 경찰을 피해 그가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져내릴 듯한 회색 지붕 위뿐이다.

베니는 또다시 학교를 옮겨 이번에는 슐로스 노이젤렌 기숙 학교로 오게 된다. 낙제를 받고 학교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으니 새 학교에 대한 설렘이 있을 리 없다. 원래는 새하얬을 벽이 이제는 얼룩져 거무튀튀한 잿빛으로 변한 것처럼 베니에게 학교 생활은 새로운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 매일 엄마, 아빠의 싸우는 소리에 진저리가 나도, 누나가 레즈비언이어도 이제는 방과 후 집에 갈 수조차 없다.

그러나 베니에게는 자신들을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어릿광대들이 있다. 이들은 베니를 나무에 몇 시간이나 묶어 놓고 놀려대지도, 그의 간식거리를 빼앗지도 않는다. 베니가 미친 짓을 할 용기만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우리는 미친 영웅이야'라고 짐짓 호탕하게 큰 소리를 쳐도 불확실한 미래에 금세 목소리가 잦아드는 우리의 불쌍한 영웅들.

베니는 둘째 날 이들과 어울려 여학생 기숙사를 찾아간다. 여학생 화장실에서 일방적으로 총각 딱지를 떼는 베니. 비틀거리면서 화장실을 나서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는 급하게 들이킨 맥주를 모조리 게워낸다. 토한 맥주의 쓴 맛처럼,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콘돔처럼, 베니의 첫 경험은 그렇게 씁쓸하게 지나간다. '첫경험 후에 남자가 된다고? 나는 여전히 꼬마 겁쟁이인데.' 아직 그에게는 이룬 것이 하나도 없는, 인생이란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세계에 불과하다.

어느 날 이들은 기숙 학교를 도망치기로 결정한다. 일탈, 전율, 흥분, 웃음, 한숨, 불안. 이들은 마을에서 만난 한 노인을 따라 뮌헨으로 간다. 그곳에서 스트립쇼를 보고 이들은 욕망의 극단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하루 밤의 일탈은 베니가 스트립 걸 팬티 속에 10달러를 쑤셔넣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찾아내기 위해 '인생의 길'을 위태롭지만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다. 미친 짓이더라도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길을 향해. 열여섯살의 잿빛 젊음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우리에게도 꿈틀거리는 삶이 있어. 뭔가 기발한 짓을 하기 위해 이제 무대로 올라갈 거야" 이들의 치기 어린 방황을 무대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다. 10대에는 10대 나름대로의 끓어오르는 삶과 욕망이 있으므로.

오현아 Books 기자(perun@joins.com)

▶〈크레이지〉와 함께 읽을 만한 책들
* 비상구 (김영하 지음, 문학과지성사,〈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 수록)
* 내가 사랑한 캔디(백민석 지음, 김영사)
* 꼬마 이방인(기욤 게로 지음, 김용채 한정석 옮김, 자인)
* 젊은날의 초상(이문열 지음, 민음사)
*호밀밭의 파수꾼(J.D 샐린저,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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