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나흘간의 세계해킹 열전

중앙일보

입력

냉장고는 음식물을 녹여 물을 흘리고 있다. 전기밥통이 바이러스에 걸린 것도 모르고, 밥을 태웠다고 부부싸움을 하고 있다.

휴대전화가 갑자기 미쳐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댄다. TV는 갑자기 이상한 화면을 보낸다. 공항 관제탑이 엉뚱한 곳으로 비행기를 유도한다.

방송국의 송신소가 크래커들의 수중에 들어가 이상한 방송이 나간다. 미사일이 오작동을 일으키고 자살골을 넣는다.

*** 음지의 해커들 양지로

이런 일들은 만화가 아니다. 10년안에 벌어질 일이다. 21세기는 네트워크 사회다. 모든 기계가 유무선으로 연결된다.

연결돼 있는 한 해킹과 바이러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냥 놔두면 ''정보화가 재앙'' 이 될 수도 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국방을 위해서도 그렇고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도 그렇다. 네트워크화한 모든 기계에는 보안소프트웨어가 필요해진다.

이렇게 많은 보안장치를 우리가 만들지 않으면 누가 만들겠는가. 우리의 국방을 우리가 준비하지 않으면 누가 대신해 주겠는가. 그래서 정보보호산업은 기간산업이고 방위산업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정보보호센터에서는 지난 6월 27일부터 30일까지 4일간 기술개발 촉진과 국제기술교류를 위해 세계정보보호올림페어(일명 해킹대회) 를 개최했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해커들을 양지로 끌어내 국익을 위해 활동하게 해주자는 뜻도 있었다.

참가자는 인터넷을 통해 주최측이 마련한 세단계의 컴퓨터서버를 공격하고 수비한다. 1단계 컴퓨터를 점령하면 2단계로 갈 수 있는 열쇠가 있다. 2단계 컴퓨터에 도달하면 화면에 자기 이름을 써서 자신이 2단계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이때 경쟁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자신의 기술로 방어한다. 그러면서 최종단계인 3단계(일명 백마고지) 로 가는 지도를 읽고 다음 컴퓨터를 공격하고 수비한다.

대회에는 전세계에서 3천6백67팀이 참가했다. 대회기간 96시간은 그야말로 혈전이었다. 기상천외의 공격.수비기술이 전개됐다.

자신의 공격기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방해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도 선보였다. 가장 치열했던 순간에는 컴퓨터의 주인이 한시간에 3백번 이상 바뀌기도 했다. 종료시간이 가까워오자 공격이 폭주해 주최측 컴퓨터가 맥을 못추는 사태도 발생했다.

손에 땀을 쥐며 상황실을 지키던 운영팀의 입에서는 게임종료 신호가 나오자 아쉬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백마고지에 입성한 사람이 없고, 입상자 모두가 한국인인 것이다.

결국 2단계를 마지막까지 수비한 팀이 2등(상금 2만달러) 을, 그 직전까지 2단계를 지켰던 팀이 3등(1만달러) 을 차지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해킹을 한 사람에게 특별상(1만달러) 을 주기로 했다.

그동안 해킹기술에 관해서는 국제적인 교류가 없었고 따라서 우리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팀의 기술을 주시했다.

*** 미래 방위산업 중추 담당

외국인들은 모두 21개국에서 7백11팀이 참가했다. 총 1백28팀이 1단계 컴퓨터를 통과했는데, 그중에 외국인은 14팀이었다.

미국이 2백97팀 중 6팀, 일본이 1백49팀 중 2팀, 노르웨이가 84팀 중에 3팀이 통과했다. 전체 참가자를 보면 외국인이 20%인데, 1단계 통과자는 11%에 그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까? 외국에서는 실력자들이 오지 않았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번 1등의 상금이 5만달러였던 점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이 게임은 인터넷을 통해 하기 때문에 먼거리에 있으면 네트워크가 느려 다소 불리한 면이 있다. 결국 우리가 앞섰다고 장담하기도 어렵고 뒤진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번 대회의 백미는 오는 20일에 있을 시상식이다. 수상에 앞서 입상자들은 KAIST 학생들 앞에서 자신들의 비법을 특강으로 풀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http://www.isc.kaist.ac.kr). 음지에 있던 해커들을 발굴해 대학강단에 세우고 미래 방위산업의 전사로 만든 것이 이번 대회의 가장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한가지, 외국인 수상자의 특강은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없게 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광형 (한국과학기술원 미래산업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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