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ro 2000] 이탈리아·네덜란드전 관전평

중앙일보

입력

이탈리아 대 네덜란드의 준결승 마지막 경기.

경기의 승패를 떠나 이탈리아의 놀라운 투혼과 최고의 수비가 빛난 한판이었다.
전반 이른 시간 잠브로타의 퇴장에 의한 숫적 열세와 독일 심판의 잇단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더더욱 어려운 경기를 펼쳐야만 했던 이탈리아는 '카테나치오', 그들이 자랑하는 빗장수비로 이번 대회 최고의 공격력을 과시한 네덜란드의 무차별 공세를 완벽에 가깝게 막아내는 기적 같은 저력을 발휘했다.

물론 네덜란드에게 두 번의 PK를 허용하며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지만, 톨도의 놀라운 선방에 행운마저 따라주면서 경기를 불리함 속에서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었다.

경기 시작부터 네덜란드의 공세는 심상치 않았다.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수비 깊숙이 포진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초반 세찬 그들의 공세에 채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듯한 어수선함마저 보여준다.

미드필드의 월등한 장악력을 바탕으로 젠덴과 오베르마스의 측면 돌파가 계속되는 가운데 전반 14분 베르캄프의 우측 문전에서의 개인기 돌파에 이은 슈팅이 왼쪽 골포스트를 때리는 등 줄기차게 이탈리아 문전을 위협했지만 고대하던 골은 터져주지 않았다.

좌우 측 젠덴과 오베르마스의 스피드에 의한 돌파, 그리고 뒤를 받쳐주는 반 브롱크호스트와 보스펠트의 오버래핑, 중앙 쪽의 클루이베르트에 연결되는 빠르고 세밀한 전진 패스에 의한 공격 등이 전반 슈팅수 10대0이 말해주듯 이탈리아 진영에 진을 치고 맹폭을 퍼부었다.

그러던 전반 33분.
젠덴을 수비하던 잠브로타-지난 99/00 시즌 이탈리아 세리에 A 최종 라운드 페루지아와 유벤투스의 경기서의 퇴장을 연상시키는 듯한-가 두차례의 경고로 퇴장을 당하면서 경기의 흐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반 37분 우측의 오베르마스로부터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의 클루이베르트에게 볼이 연결되는 순간, 네스타의 반칙이 선언되고 PK가 주어지면서 승부는 손쉽게 가늠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킥커로 나선 프랑크 데 부르의 슈팅을 골키퍼 톨도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막아내면서 경기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전반 내내 벌어진 하프코트 게임은 후반 역시 예상되는 바였다.

후반 들어 잠브로타를 대신해 미드필드로 내려앉아 경기를 풀어가던 델 피에로에 의해 몇 차례 역습이 시도되면서 이탈리아가 약간의 공격 의지를 보였다는 것을 제외하곤 전반과 다를 것이 없는 양상의 경기였다.

네덜란드는 인자기를 전담 마크한 스탐과 프랑크 데 부르만을 자기 진영에 남겨둔 채 전원이 이탈리아 진영 구석구석에 포진되어 후반 공습을 재개했다.

이에 맞서는 이탈리아는 수비형 미드필더인 알베르티니와 디 비아지오, 그리고 왼쪽 사이드 어태커로 나선 말디니가 자기 진영 중앙에서의 필터 역할을 적절히 해주었고, 최후방의 네스타와 카나바로의 노련한 수비 커버가 흠잡을 데 없이 이루어졌다.

다만 전반 베르캄프에 한차례 돌파 당하기도 했던 율리아노가 비교적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결국 그의 다비즈에 의한 태클이 또 한차례의 PK로 이어지고 말았다.

다시 주어진 페널티 킥.
그런데 또다시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클루이베르트의 자신 없는 슈팅이 정확히 오른쪽 골포스트를 튕기고 만 것이다.

이에 사기가 오른 이탈리아는 후반 인자기, 피오레와 교체 투입된 델베키오와 토티를 앞세운 역습 공세에 나선다.

미드필드에서 커트한 볼을 롱패스에 의해 단번에 문전 공략을 노리거나, 델 피에로가 미드필드 쪽으로 치고 나오면서 상대 반칙을 유도해 이를 세트 플레이로 연결하는 식의 공격 방법이 오히려 타성에 젖은 듯한 네덜란드의 공격에 비해 간간이 더 위협적이라 할 수 있었다.

지루한 공격과 방어가 계속되는 가운데 경기는 어느새 연장 후반으로 치닫고 델베키오와 클루이베르트가 한 차례의 결정적인 골 찬스를 갖기도 했던 양팀은 결국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승부차기.
전, 후반 두 개의 선방에 고무된 톨도의 자신 만만한 모습에 비해 네덜란드 선수들은 왠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첫 키커로 나선 이탈리아의 디 비아지오가 가볍게 골네트를 가른 반면, 네덜란드의 프랑크 데 부르는 또한번의 페널티킥을 실축하게 되고 이후 키커로 나선 네덜란드의 스탐과 보스펠트역시 톨도의 벽을 넘지 못하면서 결국 네덜란드는 12년 만에 자국 땅에서의 우승의 꿈을 허공에 날려버리고 말았다.

오늘 경기는 무엇보다도 근래 보기 드문 수비 축구의 완성판을 보여준 이탈리아의 철벽 수비를 칭찬할 수 있는 경기였다.

경기 내내 흔들림 없이 한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은 채 상대의 공격 방향을 미리 간파하고 슈팅과 패스, 돌파의 길목을 정확히 차단하는 노련한 수비는 가히 완벽이라 할 수 있었고,
말디니의 노련한 경기 운영과 네스타, 카나바로의 빠른 판단력과 순발력에 의한 지능적인 수비 대응, 델 피에로의 미드필드에서의 출중한 드리블링과 지능적인 공격 지연 전술은 이탈리아를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전 수문장으로 예상되던 부폰의 대회 직전 부상 탈락의 공백을 잘 메워주며 눈부신 선방으로 이탈리아의 결승 행을 견인한 톨도의 활약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퇴장 당한 잠브로타를 제외한 이탈리아의 전 선수가 오늘 경기의 MVP라고 말한다해도 과언은 아닌 훌륭한 플레이를 선보인 경기라 할 수 있겠다.

이제 32년 만에 대회 정상을 바라보게 된 이탈리아.
프랑스와 맞붙게될 결승전을 예상컨대, 오늘 경기에서의 체력소진과 경고누적으로 인한 후유증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승부의 가장 큰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그들의 투혼과 세계 최고의 빗장 수비가 빛을 발한다면 과연 그들을 위협할 상대가 있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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