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고 진득한 우리 언어 소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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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가리켜 '부족방언의 마술사' 라고 표현한다.

한민족을 부족이라고 하고 우리말을 방언이라고 하기엔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여하튼 시인은 한 나라, 한 민족의 언어를 갈고 다듬는 자라는 의미만큼은 충분히 공감을 주는 바 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요즘 시인이나 작가의 글에서 정작 부족방언의 참맛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점차 희소해지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꼭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몇몇 선배 세대 작가의 경우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기 위해선 사전을 옆에 두고 틈틈이 펼쳐보아야 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 고유의 말을 가꾸고 보존하는 데 그만큼 열심이었다는 사실의 증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이런 체험을 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물론 세대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업화 도시화 서구화의 여파로 우리의 언어 현실 또한 급속히 부족방언으로서의 독자성이 중화 망각되고 있다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소영교수의 〈우리말의 속살〉(창해)은 내게 적지않은 자극과 반성을 안겨주었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우리말의 내밀한 '속살' 을 더듬어나간 글들을 모은 것으로서 우리말 속에 숨어 있는 '정겨운 삶' 을 하나하나 드러내줌으로써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답고 흥미로우며 또 심오한 것인지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말에 대한 저자의 지극한 사랑과 관심의 행로를 따라가며 나는 이제 부족방언의 마지막 수호자가 시인이 아니라 국어학자가 되어버린 세태를 다시금 되씹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의 우리말 유람기에 일정한 격식이나 순서는 없다. 임신이나 출산, 질병이나 바느질 같은 일상 생활에 쓰이는 우리말에 담긴 진득한 뜻에서부터 명절이나 농경, 형벌에 사용되는 언어를 거쳐 지명이나 인명에 담긴 은근한 의미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우리말의 이모저모를 선명하게 돋을새김해놓고 있다.

예컨대 저자가 대표적인 농경 용어로 손꼽는 '짓다' 라는 말을 보자. 농사만 짓는게 아니고 집도 짓고 옷도 짓고 밥도 짓는다고 한다.

의식주 전반에 걸친, 그야말로 생산과 창조의 근원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글도 '짓는다' 라고 하나보다.

또 짓(作)과 집(家)이 같은 어원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우리의 상상력은 훨씬 광대한 영역까지 맴돌게 된다. 거기다 이 '짓' 은 사람에게도 달라붙어 지아비 지어미라하여 부부의 호칭으로도 사용된다 하니 말의 무궁무진한 활용과 변신이 경탄스러울 뿐이다.

또한 욕설이나 노름에 관련된 용어를 다룬 대목은 읽다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지명에 얽힌 전설을 소개하는 글들은 말을 통한 문화유산답사기라도 되는 양 재미있었다.

우리말에 대한 사랑엔 '나' 와 '남' 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이 글에 관련된 일을 하는 몇몇 서생들만이 아니라 보다 많은 일반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 읽는 책이 되었으면 한다.

남진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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