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날 때 아는 것도 경영자의 자질이죠”…정문술 미래산업 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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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5일 밤 서울 테헤란 밸리의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 다이아몬드홀.
미래산업의 정문술 사장(62)이 이끄는 ‘벤처 리더스 클럽’의 월례 정기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기자들 사이에 ‘벤처 청문회’라는 입소문이 파다했던 행사-IT(정보기술)업체 등 벤처를 담당하는 기자들과 내로라 하는 벤처 CEO(최고 경영자)들이 만나 이 나라 벤처들의 문제와 앞날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는 자리였다.
벤처주 거품론이 무성한 시장 분위기 탓인지 기자들의 질문은 “일부 벤처 CEO들이 지분을 매각해 개인투자자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기도 한다”는 둥 벤처 기업가들의 도덕성을 겨냥했다. 토론자로 나선 박상일 PSIA 사장은 “창업자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로 곤혹스러운 심정을 우회적으로 토로했다. 그런데 정문술 사장이 마무리 발언에서 “벤처 기업가들이 돈을 벌었다는 말이나 돈을 탐한다는 말이나 다 잘못됐다”고 꼬집었다. 다음 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진의를 물었다.
“벤처 기업이 코스닥에서 자금을 동원했다면 번 게 아닙니다.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거죠. 전통 기업들이 실적을 바탕으로 공모를 하거나 유상증자한 것과는 다릅니다. 미래가치를 보고 개미군단이 신탁한 돈을 ‘벌었다’고 하는 시각엔 문제가 있어요. 반면 기업인이라면 유상증자 등을 통해 돈을 많이 모아 사업하고 싶게 마련입니다. 많이 모아, 많이 벌어, 많이 나눠 주고 싶은 게 기업하는 사람들의 인지상정이죠. 기업인들에겐 돈 벌 책무가 있어요. 이 점은 전통 기업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일부 벤처 기업들이 표방하는 ‘나눔의 문화’에 대해서도 유보적이었다.
“자기 지분을 팔아 기부를 한다면 그거야 좋은 일이죠. 하지만 남들이 신탁한 돈으로 기부를 한다면 문제가 다릅니다. 좋은 제품을 생산하고 부가가치를 올리는 데 쓰고, 그래서 번 돈으로 기부를 해야죠.” 사실상 오너지만 사적으로 회사돈을 갖다 쓰는 일이 없는 그는 “평생에 돈 문제 하나만큼은 극복하고 싶다”고 말해 왔다. 무엇보다 그는 퇴장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같은 날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라이코스코리아는 가종현 미래산업 경영지원팀장(33)을 신임 사장으로 선임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는 회장으로 추대됐고 라이코스코리아의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지난 1월 자본금 1억원의 회사를 출범, 7개월 만에 유상증자를 통해 3천6백억원짜리로 키워낸 지 4개월 만이다. “창업 후 1년간은 나 같은 사람이 적합합니다. 이미 형성된 이미지도 있고, 추진력에 노련미랄까, 모험심도 있구요. 단기간에 세 모으고, 조직하고,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데는 제격이죠. 그런데 이제부터는 기술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콘텐츠를 알차게 가꾸고, 연동시켜 수익으로 연결하는 일은 젊은 감각의 경영자를 필요로 합니다. 나도 트렌드는 읽고 있지만 나이가 많고 공부를 안 하는 사람이라 지식이 달립니다. 물러날 때를 아는 것도 경영자의 자질이고 덕목이죠.”
지난 1월 미국에서 주식예탁증서를 발행한 미래산업의 실사를 맡고 “이런 기업문화를 가진 회사에서 근무한다면 행복할 것 같아 무작정 사표 내고 정회장을 찾았다”는 변호사 출신의 신임 가사장은 이 날 기자간담회에서 “이제 비전 제시는 내가 맡고 정회장은 미래산업의 기업문화를 라이코스에 옮겨 심을 것”이라고 밝혔다.
마흔다섯의 나이에 늦깎이로 사업에 뛰어들어 미래산업을 창업한 그는 경영학도도, 미국 실리콘 밸리 CEO의 70%를 차지한다는 이공계 출신도 아니다. 벤처는 젊은 나이가 아니라 젊은 정신으로 한다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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