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클럽의 배신’ 믿을 만한 저축은행 어디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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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자영업자 김모(48)씨는 최근 거래하던 저축은행에서 1억원가량의 예금을 모두 뺐다. 연초부터 저축은행 영업정지 행진이 계속돼 불안감을 도저히 잠재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빼고 보니 난감했다. 금리가 4%를 밑도는 시중은행에 넣긴 아무래도 아쉬웠다. “1%포인트 금리 차이면 연 100만원인데 내겐 적지 않은 돈”이라는 게 그의 토로다. 김씨는 결국 저축은행으로 되돌아가기로 했지만 어떤 곳이 괜찮은지 몰라 망설이고 있다.

 저축은행 영업정지 러시 속에 우량 저축은행을 선택하는 기준이 실종됐다. 올 초만 해도 통용되던 ‘8·8클럽’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탓이다. ‘8·8클럽’은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 비율 8% 이상, 부실여신 비율 8% 미만인 저축은행들을 가리킨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여기에 해당됐던 저축은행 상당수가 올해 구조조정 과정에서 줄줄이 문을 닫았다.

 대형 저축은행이면서 지난달 18일 영업정지 된 제일·토마토가 대표적이다. 제일저축은행은 지난해 BIS 비율 8.74%, 고정이하(연체 3개월 이상) 부실여신 비율 6.29%를 기록해 ‘우량’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불과 1년 새 BIS 비율이 -8.82%로 곤두박질쳤고 부실여신 비율도 27.49%로 급등했다. 토마토 역시 같은 기간 동안 BIS 비율이 9.45%에서 -11.47%로 추락했다.

프라임·에이스 등 함께 영업정지 된 다섯 곳도 모두 지난해엔 부실징후를 느낄 수 없던 곳들이다. 예금보험공사 이미영 팀장은 “BIS 비율로 저축은행이 건전한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이 꼽는 새로운 선별 기준은 네 가지다. 우선 부실의 가장 큰 원인인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비중이 작아야 한다. 현재 자산관리공사(캠코)가 사 준 7조원가량의 부동산 PF 대출 중 66% 이상이 토지 매입도 완료하지 못한 상태다. 그만큼 회생 가능성이 작다는 얘기다. 부동산 PF 대출 비중이 업계 평균인 20%를 많이 웃돈다면 상대적으로 위험이 크다고 봐야 한다.

 



둘째는 당기순이익이다. 단순히 한 해 치만 확인하지 말고 변화 추이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예보 관계자는 “한 회계연도에 순이익을 많이 낸 것보다는 1억원씩이라도 꾸준히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좋지 않다. 실적 편차가 작은 곳이 그만큼 대출을 잘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셋째는 단순자기자본 비율이다. 이 비율은 BIS 비율 산정 때 포함되는 후순위채나 하이브리드채권을 제외하고 계산한다. 빌린 돈이 아니라 실제 자본력을 보다 잘 보여 준다는 뜻이다.

정형권 한국은행 전문연구원은 “후순위채나 하이브리드채권을 많이 발행하면 BIS 비율이 높아지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건전성엔 변화가 없다”고 분석했다. 오히려 이들 채권에 대한 원금 상환과 고금리 이자 지급, 고배당이 부메랑이 되기 쉽다. 정 연구원은 “당국도 저축은행의 건전성을 규제할 때 단순자기자본 비율을 중요한 참고지표의 하나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미국은 은행에 대한 적기 시정조치 발동 때 BIS 비율과 단순자기자본을 함께 고려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대출 포트폴리오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소액대출·채권·기업금융·해외사업 등에 골고루 돈을 빌려 준 곳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각 부문에서도 되도록 소액을 많은 사람에게 빌려 준 저축은행이 낫다. 일부 저축은행은 사업보고서나 감사보고서에서 이를 공개한다.

나현철·김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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