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에서 만난 사람 - 〈결혼식〉의 파벨 룽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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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택시 운전수와 알콜에 찌든 유대인 음악가의 조우를 사실적으로 그린 〈택시 블루스〉로 한국에서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는 러시아 감독 파벨 룽긴은 올 칸영화제에서도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만큼 사실적인 영화 〈결혼식〉(The Wedding)으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경쟁 부문 진출작인 〈결혼식〉은 탄광촌 리프스키에 사는 젊은이가 오래 전 마을을 등진 여자친구를 다시 만나 결혼하는 과정을 통해 공산정권 붕괴 후 러시아의 현실을 그렸다.

15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보통 사람들의 솔직 담백한 생활을 고스란히 화면으로 옮기고 싶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 이 영화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지금 러시아에서는 공산 정권이 붕괴했는데도 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빈곤에 허덕이고 선거로 대표자를 뽑아 놓고도 그들의 횡포에 짓눌려 산다. 리프스키에서는 마치 시간이 정지해 있는 것 같다. 사회주의는 종말을 고했지만 새로운 삶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

- 〈택시 블루스〉 이후 관점에 변화가 있었는가.

"그 작품에 대한 국제적 열기에 나 자신도 놀랐다. 나는 뭔가 변했다고 생각하는데 관객들이 감지할지는 모르겠다. 특정 순간의 리얼리티를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는.

"격변기를 거치면서 보통 사람들의 가족·사랑·어린이·우정 등에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자본주의 문화의 폐해도 고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이 꼭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메시지도 담고 싶었다."

- 고국의 장래를 믿는가.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미슈카는 평범하고 근면한 청년이다. 이런 존재들에게 자기 희생은 인생 자체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슈카처럼 사회의 탐욕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의 힘에 의지할 수 있는 한 러시아는 언제나 젊은 피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 장르가 모호한 것 같다.

"러브스토리는 아니다. 결혼식은 젊은 세대들의 인간관계를 말하려는 장치일 뿐이다. 그리고 러시아 문화를 전하는데는 결혼식 만큼 훌륭한 예가 없다. 극단적인 성격들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가. 마을의 삶의 모습을 통해 러시아 주민들의 정신적·정치적 리얼리티를 살리고 싶었다."

49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는 모스크바대학 구조언어학부를 졸업한 뒤 모스크바 영화학교에서 각본을 공부했다.

각본을 직접 쓴 〈택시 블루스〉로 90년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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