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을 때부터 오른쪽 엉덩이 아래에 무엇인가 이물감이 느껴지긴 했다. 안전벨트겠지. 요즘은 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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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호 10면

앉을 때부터 오른쪽 엉덩이 아래에 무엇인가 이물감이 느껴지긴 했다. 안전벨트겠지. 요즘은 버스 좌석에도 안전벨트가 있는 것 같으니까. 나는 피곤했고 귀찮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짧은 여름휴가를 보내고 출근하는 첫날 아침. 버스 안에 앉은 직장인의 몸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시계처럼 축축 늘어진다. 전세로 있는 아파트에 주인이 들어온다고 해서 휴가 내내 이사 갈 집을 보러 다녀야 했다. 전셋값은 너무 올랐고 그나마 물량도 없다. 결국 마땅한 집은 찾지 못했다.

군에 있는 첫째가 휴가를 나왔고, 둘째는 군에 입대했다. 화요일에는 아내와 함께 의정부시 용현동 306보충대까지 가서 둘째를 군에 보냈다. 그날 저녁엔 반주로 소주를 한 병 마셨다. 모두 휴가 중에 있었던 일이다.

시간이 갈수록 엉덩이 아래가 배겼다. 피곤하고 귀찮지만 나는 오른쪽 엉덩이를 들고 물체를 꺼낸다. 스마트폰이다. 내 자리에 먼저 앉았던 승객이 흘린 것이리라. 새 모델인데 검은색 커버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다. 휴대전화 주인은 남자일 것이다. 전면에 붙여놓은 보호필름의 밀착 상태가 고르지 못한 점만 봐도 틀림없다. 그냥 자리에 버려 둘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내가 주웠으니 직접 돌려주는 것이 옳을 것 같아 일단 보관하기로 했다. 전화기 대기화면에 적힌 글귀도 주인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켰다. “나는 새 뒤로 나는 새 어디로 가야 할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기보다는 어디에서 왔는지 생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으니까요.” 꽤나 멋을 부리는 사람일 것이다. 어쩌면 좋은 술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

금방 자신이 잃어버린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인은 전화기를 잃어버린 사실을 아직 모르는지 전화는 오지 않는다. 꼼짝없이 남의 전화기만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드디어 전화가 온다. 역시 남자다. 주인은 아니다. 자신은 지인인데 전화기 주인에게 알려주겠다고 한다. 한참 후 전화가 온다. 여자다. 그것도 목소리가 예쁜. 내가 있는 사무실의 위치를 알려주자 곧 찾으러 오겠다고 한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나이는 몇 살일까? 주인이 여자란 것을 알고 나니 휴대전화도 괜히 예뻐 보인다. 감사하다고 커피라도 한 잔 사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저녁 식사라도 대접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거절하지? 나는 유부남인데. 너무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텐데. 아아, 이 일을 어쩌지. 로비에 도착했다는 여자의 전화를 받고도 나는 곧장 내려가지 않고 화장실에 들러 거울에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본다. 어제 술을 마셔서 그런지 눈알은 빨갛고 얼굴은 푸석푸석하다. 오늘따라 숱 적은 머리는 더 쓸쓸해 보인다. 넥타이를 고쳐 매며 두 번인가 웃는 연습을 해본다.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한데 말이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살짝 선 보러 가는 기분마저 든다.

“정말 감사합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여자는 목소리만큼이나 예뻤다. “뭘요. 당연한 일을 한 건데요.”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까지 하고 왔지만 내 얼굴은 점점 굳어간다. 여자 옆에는 잘 생기고 듬직해 보이는 남자가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고 서 있었다. 그때 비로소 생각이 났다. 언젠가부터 내 휴대전화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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