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인 라이히씨의 한국 현대미술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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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세계 공용어입니다. 한국 현대미술이 담고 있는 독특한 매력을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다 보면 이질적인 문화권 사이에도 다리가 놓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위스 출신 화상(畵商)마틴 라이히(38).그는 지난달 말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로비에서 '오프닝' 이라는 제목으로 미니멀리즘 계열 화가 장화진·구영모씨의 전시회를 열었다.

24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는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 현대미술을 소개하려는 취지로 마련한 자리다.

미술품을 사고 파는 영리 목적은 없다. 앞으로 8개월 안에 이런 전시회를 다섯 번 더 마련할 작정이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에 별 연고도 없는 그가 박영덕화랑·박여숙화랑 등 비교적 탄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화랑들과 손잡고 일한다는 점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가능했던 일은 아니다.

"1996년 한국에 온 이후부터 인사동·압구정동·사간동 등을 순회했어요. 화랑마다 일일이 방문하면서 어떤 작가가 있나, 어떤 작품이 좋나 살펴봤어요. 물론 제 계획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 어려움이 많았죠. 언어 장벽도 있었지만 한국은 아는 사람의 소개 없이 혼자 뭘 한다는 게 참 힘들더군요."

라이히는 한국에 온 이유를 "아시아에 대한 관심 때문" 이라고 밝혔다. 할아버지 대부터 베른에서 화랑을 하는 집안 배경 덕에 그도 대학 졸업 후 취리히에 있는 한 경매회사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만난 한국·중국·일본·티베트 등 아시아 미술품의 이국적 분위기는 매혹적이었다. "현지 스위스인 누구도 아시아에 대한 지식이 없었어요. 가령 '한국' 이라고 했을 때 아무 이미지나 감흥이 없는 식이지요. 자신이 다루는 미술품에 대해 이렇게 모르면서 고객을 상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컴퓨터 회사를 경영하는 삼촌을 도우러 잠깐 머물렀던 2년 간의 호주 생활도 한국행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시드니에서 정말 좋은 한국인들을 많이 만났어요. 한국에 살면서 한국 미술을 배우면 어떨까 생각했죠." 한국에 온 첫 해는 주로 연세대 어학당에서 말을 익히느라 바빴다. 라이히는 간단한 대화는 한국말로 나눌 수 있을 정도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특징은 색채가 참으로 감각적이라는 점" 이라고 말한다. 또 "자아를 주로 탐구하는 서구와 달리 특정 주제나 대상을 묘사하는 식"이라고 덧붙인다.

외교관이나 상사주재원 등 각종 자리에서 만난 외국인들에게 이를 설명하자 몹시 흥미로워하는 것을 보고 그는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갈증이 있다"고 판단했다.

"궁극적으론 이 사람들이 한국 작가들을 자기 나라의 주요 미술관이나 화랑에 소개하도록 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의 왕래가 잦은 호텔 로비로 전시 장소를 잡았다. 지난 몇년간 다녀본 한국의 화랑들은 아무나 들어가기에 문턱이 너무 높았던 탓이다. 전시 비용은 한 스위스 보험회사의 후원을 받았다.

주한 스위스 대사·강영훈 전 국무총리 등이 참석한 개막일에는 작가들로부터 작품 1점씩을 기증받아 경매에 붙였다. 수익금은 자선단체에 기부할 생각이다.

"이 일에만 정신이 팔려 결혼할 때를 놓쳤다"고 씩 웃는 라이히는 자신의 사무실 이름도 '효진(孝進)라이히' 로 이름지었다. '효'와 '진'이 담고 있는 뜻이 마음에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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