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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폭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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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중앙SUNDAY 국제·지식에디터

최근 세계 최대 기독교 단체 중 하나인 CCC가 내년부터 크루(Cru)로 개명한다고 발표했다. 196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CCC(Campus Crusade for Christ)는 ‘그리스도를 위한 캠퍼스 십자군’이라는 뜻이다.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 본부를 둔 CCC는 1951년 고(故) 빌 브라이트 목사와 그의 아내 보테트가 창설했다. 브라이트 목사는 이미 20~25년 전에 단체 이름을 바꾸려고 했다고 한다. ‘십자군’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연쇄 테러범인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이 범행 일자를 7월 22일로 삼은 것은 그날이 제1차 십자군이 1099년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한 날이라는 점을 의식한 것 같다.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십자군은 무슬림·유대인뿐만 아니라 현지 기독교인들까지 학살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테러는 종교와 폭력의 관계에 대한 해묵은 논쟁에 십자군 전쟁과 더불어 주요 사례로 등장하게 됐다.

 종교와 폭력의 관계에 대해선 대략 세 갈래로 논쟁이 벌어진다. 하나는 “우리 종교는 평화적인데 당신네 종교는 폭력적이다” “적어도 우리가 믿는 종교가 덜 폭력적이다”라고 주장하고 이를 입증하려 하는 것이다. 예컨대, ‘기독교 성경과 코란 중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인가’ ‘기독교 역사와 이슬람 역사 중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인가’를 따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종교에는 폭력성이 내재돼 있다”고 보는 것이다. 폭력과 관련해서는 모든 종교가 오십보백보이며 특히 유대교·기독교·이슬람 등 일신교는 모두 폭력성이 강하다는 주장이다. 영국 인류학자 모리스 블로크는 “종교와 정치는 권력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본다. 권력은 폭력을 수반하기에 종교와 정치는 모두 폭력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논쟁의 세 번째 방향은 종교의 반격에서 나온다. 종교와 폭력을 밀접하게 보는 것은 신화라는 주장이다. 종교가 연루된 유혈 참극은 유럽·중동 역사의 문제이지 기독교·이슬람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이다.

 종교와 폭력의 관계를 둘러싼 이런 논쟁은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유럽·미국에서 전개되는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를 봐도 그렇다.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世俗五戒) 중 임전무퇴(臨戰無退)는 결국 폭력의 한 형태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유교나 동학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정신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최근 유럽이나 미국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여야 간의 첨예한 대립이나 1인 가구 비율과 이혼율의 급증, 노령화 등이 그것이다. 종교와 폭력의 관계도 이 땅에서 재연될까. 다행인 것은 한국의 종교 인구 구조가 유럽·미국과 다르다는 것이다. 유럽은 이슬람 인구가 급증하고 기독교는 기진맥진한 상태다. 노르웨이에서 교회 출석률은 유럽에서도 가장 낮은 3~5%다. 이슬람 인구는 2~3%에 불과하지만 맹렬히 증가하고 있다. 리비아 지도자 카다피는 “신(神)이 유럽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유럽과 같은 종교 인구 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심리적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각 종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안정세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종교들과 역사의 관계도 다르다. 서구에서 가톨릭은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반동적’인 종교였다. 가톨릭은 우리나라에서 신분차별을 없애는 등 진보적인 기능을 했다. 이슬람도 서구와 중동의 갈등 원인 중 하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중동과 우호 관계에 일정한 몫을 수행하고 있다.

 상당수 서구 종교인들이 종교와 폭력의 관계에 대해 고민한다. 성경에는 폭력적인 대목이 1000여 개가 있다고 한다. 신(神)이 직접 폭력을 행사하거나 인간의 폭력을 옹호하는 장면들이다. 한국에도 그런 신앙인들이 더 많아져야 할까. 그렇게 되는 게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그런 고민을 보다 심각하게 할 때가 됐다.

김환영 중앙SUNDAY 국제·지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