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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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는 엄밀하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항상 낭비하고 탕진하고 소비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이유에서다. 즉 개인이나 사회가 생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잉여분을 소비할 때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가 한 말이다. 그에 따르면 한 개인, 한 사회의 만족은 그 개인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소비할 때 비로소 찾아온다. 낭비야말로 인간 행복의 필요조건이라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낭비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오늘날 이 ‘진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개인과 사회는 많지 않다. 필요한 것만큼만 소비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숨이 막혀 버릴 것이다. 그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같은 물건을 소비하더라도 배급받는 것과 그것을 스스로 구매하는 것은 전혀 다른 심리적 결과를 낳는다. 또 같은 물건을 구매하더라도 물건이 조금밖에 없는 구멍가게에서 구입하는 것과 엄청나게 많이 쌓여 있는 대형 할인매장에서 구입하는 것은 그 만족감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

지금 내가 얼마를 소비하든 보다 많이 소비할 수 있는 환경에서 그것을 소비할 때, 그러니까 소비의 ‘열린 가능성’을 의식하면서 소비할 때 나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장의 현실이든 하나의 잠재력이든 내가 마음껏 낭비할 수 있다는 전제가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자유와 행복의 가장 큰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바로 이 가능성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산업화 이후 그 낭비의 가능성이, 그 낭비의 지평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우리는 크게 확대된 낭비의 공간을 채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도 부족해 계속 더 많은 것을 낭비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필요의 한계 자체가 지속적으로 확대돼 온 것이다. 생산력의 발달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 보아야 할 것은 소위 ‘욕망의 외재(外在)
론’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소비하면 소비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소비생활이란 하나의 네트워크와 같아서 좋은 집을 사면 좋은 인테리어를 하고 싶고, 좋은 가구와 차를 사고 싶으며, 그 수준에 걸맞은 문화생활과 레저생활을 하고 싶게 만든다. 이것은 일종의 시스템으로서, 애초 내가 가진 개인적 욕망과 관계 없이 사회적으로 주어진 욕망이 나를 통제하고 조종하는 것이다. 현대 소비자의 욕망은 그 개인으로부터 발원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그는 자연히 이 끝없는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일에 모든 삶의 가치를 걸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부동의 지위를 갖는 그런 시대가 오늘인 것이다.

미국 미술가 제니 홀저의 전광판 시리즈 ‘생존’ 중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날 좀 말려 달라’(1985∼86)
는 바로 이 소비 만능의 시대에 현대인이 느끼는 실존적 위기감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자동차들이 바삐 달리는 도시의 한복판에 매달린 전광판. 그 전광판에는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날 좀 말려 달라’는 글귀가 씌어 있다. 내가 원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나의 욕망이다. 그런데 나는 이 욕망을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 욕망이 엄청나게 위력적인 힘에 의해 만들어져 내게 강제적으로 투입된 내·외부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나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니 누구든 할 수만 있거든 나를 이 욕망의 그물로부터 좀 벗어나게 해 달라. 전광판은 그렇게 외치고 있다. 밤거리를 지나다 이 전광판과 마주친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선명히 확인된 자신의 실존적 좌표에 다시 내딛는 발걸음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이주헌 아트스페이스 서울 관장 <이코노미스트 제52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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