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뭇거릴 시간 없다” 이건희 회장…달라진 ‘인사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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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69) 삼성전자 회장이 새로운 인사 방식을 꺼내 들었다. ‘연말 인사’라는 오랜 전통을 깨고 실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주요 계열사 사장과 임원을 불시 교체했다. 이 회장은 앞으로도 인사요인이 있으면 연말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인사를 하겠다는 생각인 것으로 알려졌다.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때를 놓치지 않고 적시 대응하겠다는 것으로, 삼성 체질의 근본적 변화가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1일 실적 부진을 이유로 LCD사업부장인 장원기 사장을 물러나게 했다. 장 사장은 최지성 대표이사 부회장 보좌역으로 발령났다. 삼성전자는 LCD사업부와 반도체사업부를 합쳐 DS(디바이스 솔루션스·Device Solution)사업총괄을 신설하고, 권오현 반도체 사업부 사장을 신임 총괄사장으로 임명했다. DS사업총괄 산하 경영지원실장에는 김종중 삼성정밀화학 사장을 선임했다. 후임 삼성정밀화학 사장으로는 성인희 삼성인력개발원 부원장이 내정됐다.

  삼성의 임직원들은 이번 인사를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삼성의 한 임원은 “검찰 수사 같은 특별한 경우를 빼고 삼성이 한 해 중반에 고위 임원 인사를 한 것은 입사한 뒤 처음 겪는 일”이라고 말했다. 종전까지 삼성은 실적 부진 등의 문제가 있더라도 연말 인사에서 책임을 물었을 뿐 도중에 경질하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 이건희 회장은 그룹 고위 임원들에게 “앞으로도 인사 요인이 생기면 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의 스타일이 연말 인사에서 수시 인사로 바뀔 것이란 예고다. 자연히 삼성 조직 전반에 연중 내내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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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의 인사 방침 변화는 지난해 3월 경영 일선 복귀 뒤 그룹 안팎에 강조해 온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경영 복귀 당시 사내 통신망을 통해 직원들에게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고 했다. 이 회장은 아예 지난 4월부터는 일주일에 2~3일씩 서울 서초동 사옥에 나와 현안을 챙기고 있다. 이 회장이 1987년 그룹 회장에 오른 뒤 이처럼 정례적으로 사옥으로 출근하는 것은 처음이다. 삼성이 처한 현실이 그만큼 녹록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발언들에 이어 이 회장은 결국 ‘불시 인사’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삼성의 한 고위 임원은 “이 회장이 여러 차례 언급했음에도 삼성 조직이 전반적으로 긴장감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삼성전자 임직원들은 특히 LCD사업부장이 경질됐다는 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LCD사업부의 실적은 경쟁력이 떨어져서라기보다 미국의 더딘 경기 회복과 유럽의 재정위기라는 외부 변수에 휘둘린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번 인사에는 앉아서 외부 변수 핑계를 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배어 있다”며 “앞으로 적극적으로 나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복지부동형 임원에 대해서는 수시 인사 조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삼성은 불시 인사를 통한 실적 관리와 더불어 부정부패 척결 강도도 높여가고 있다. 지난달 중순 삼성그룹 감사팀이 국민권익위원회를 찾아 공공기관 청렴도 평가와 청렴 교육에 대해 배워갔을 정도다. 국내 대기업 중 부패방지 제도 등과 관련해 권익위에 자문한 것은 삼성이 처음이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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