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속 나의 마을〉,수채화같은 영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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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제 살던 곳으로 돌려 눕는다(首丘初心)는데 인간이야 오죽하랴. 도시문명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유년시절 고향은 어머니의 품과 같다.

일본의 히가시 요이치(東陽一.66)감독의 '그림 속 나의 마을' 은 일본인의 동심을 무척 아름다운 영상으로 잡아낸 작품이다. 복잡한 스토리와 반전에 익숙한 영화팬들이라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초록이 가득한 풍경 어디를 정지시켜도 한편의 그림으로 손색이 없다.

롱 테이크와 롱 쇼트로 관객들을 '현장' 으로 빨아 들이는 촬영술이 대단하다. 리얼리즘에 충실하면서도 환상적 분위기를 위한 장치로 예언력을 지닌 노파와 도깨비를 등장시키고 있다.

이런 기법은 '마술적 리얼리즘' 이라 불린다. 망둥이가 소년의 손아귀를 요리조리 피하며 내뱉는 얄미운 말도 재미있게 처리했다.

주인공 유키히코와 세이조는 50대 쌍둥이 화가. 한 뱃속에서 태어났지만 세상살이에 휘둘리다 보니 이제 그들이 함께 했던 추억은 그림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카메라는 곧장 1948년 여름 일본 시골마을의 어느 초등학교 교실로 돌아가 형제의 유년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어머니가 그들의 담임이라는 이유로 교실 뒤에 그림이 내걸리면 마을사람들로부터 "별로 잘 그리지도 않았는데…" 라는 빈정거림을 들어야 했다.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은 질시와 반목에 무디어진 어른들에게 순수함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세이조가 할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듣고 토란 잎을 낫으로 싹둑싹둑 자르는 장면에서는 유년에 한번 정도 부려보았을 법한 반항에 미소를 짓게 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강점은 최근 소개되었던 다른 일본영화와는 달리 그 시절 일본인의 생활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전통 장례의식, 뱀장어를 잡는 방법, 어머니가 열살짜리 아들과 함께 목욕하는 장면을 통해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소득이 될 만하다. 이 작품은 실존 화가 다지마 세이조(田島征三)의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그러나 2차대전 종전 직후라는 시간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배우의 입을 통해 "그놈의 맥아더 때문에…" 라는 대사만 나올 뿐 패전의 상흔이나 찌든 삶의 흔적 등을 찾기 어려워 보기에 따라서는 리얼리티에 흠으로 지적될 수도 있다.

히가시 감독은 이 작품으로 1996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다. 19일 개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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