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청문회서 혼쭐 난 저축은행 감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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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희
경제부문 기자

지난주 이틀간 열렸던 국회 정무위의 저축은행 청문회는 역시 또 공허한 말잔치로 끝났다. 여야 의원들의 무딘 창을 전·현직 경제관료들은 노련하게 피해 갔다. 저축은행의 빠른 외형 확대와 무분별한 PF(프로젝트파이낸싱) 대출이 이번 저축은행 사태를 불러일으켰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하지만 책임 문제만 나오면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했다”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는 둘러대기가 이어졌다. 이른바 빅3(이헌재·진념·윤증현) 증인이 참석하지 않은 21일 청문회는 더욱 맥이 빠졌다.

 지루한 공방만 오가는 산만한 분위기는 이날 오후 3시30분쯤 달라졌다. 부실 저축은행에 5000만원 이상을 예금했거나 후순위채를 샀다 피해를 본 피해자 대표 2명이 이례적으로 발언 기회를 얻었다. 주어진 시간은 5분씩. 김옥주 부산저축은행 피해자 모임 대표의 진한 부산 사투리에 참석자들이 귀를 기울였다. 그는 “청문회를 보니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는데 현재는 없다.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고 미래에 어떻게 하겠다고 다짐들을 하면서 왜 현재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얘기가 없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저기 감사들을 보십시오. 낙하산 인사로 와서 제대로 감시도 못하고 월급만 많이 받고 부실은 눈감아주고. 지금 노인들이 거리에서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욕쟁이·범법자가 되고 있습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청문회에 나온 부실 저축은행 감사들이 입을 모은 듯 “불법 대출을 알지 못했다”고 말한 것을 두고 그는 “분통이 터졌다”고 했다. 감사들은 대부분 금감원·한국은행 등 감독기관 출신이다. 김씨는 재무제표 한 장을 꺼내 들고 마지막 한마디를 보탰다. “지난 3월 8일 부산 저축은행에 대해 정보 공개를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가 보내준 건 달랑 이거 한 장입니다.”

 이어 나온 박남준 삼화저축은행 피해자 모임 대표도 거들었다. “대한민국에 BIS(국제결제은행) 비율 알고 은행 거래하는 사람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저희들이 세상을 떠날 때 대한민국을 원망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틀간을 꼬박 지켜본 청문회, 기자의 머릿속엔 그 많은 정치인·관료의 말보다 이들 2명의 말만 또렷하게 남았다.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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